내 고향은 전라도 내 영혼은 한국인
내 고향은 전라도 내 영혼은 한국인
인요한(John Linton), 생각의 나무
인요한 선생님, 이 난을 시작한 지 몇 회가 흘렀으나 편지 수신인을 밝힌 적이 없었습니다. 인 선생님은 책의 저자이며, 그 책을 소개하는 편지를 받으시는 최초의 인물이십니다. 죄송한 말씀이나, 저는 가볍게 읽을 책들을 화장실에 두고 읽는 편입니다. 가벼운 책이라 함은 내용이 없다, 읽어 느끼고 배울 게 없다는 뜻이 아니라 쉽게 읽힌다는 뜻입니다. 선생님의 책은, 변기에 너무 오래 앉아 있어 엉덩이에 쥐가 나는 것도 모르고 단숨에 읽었습니다. 고맙고 뜨겁고 그러면서도 서럽고 눈물 나는 이야기였습니다.
“푸른 눈의 전라도 토박이 의사”라는 말은 굉장한 모순어법이죠? 전라도 토박이 의사가 ‘푸른 눈’이라니. 4대, 합쳐 100여 년이 넘게 한국, 그것도 차별과 저개발, 불평등과 핍박으로 얼룩진 땅 전라남도에서 그곳의 사람들과 ‘징허게’ 비비면서 살아온 푸른 눈 의사라니. 자기 자신이 그 땅에서 태어났을 뿐 아니라, 외/친할아버지(Eugene Bell, William Linton), 아버지를 그 땅에 묻은 가족사라니.
한국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를 다니다가 결핵에 걸린, 영어를 잃어버려 따로 영어교사에게 영어 과외를 받은 위의 세 형님들(David, Steven, James Linton), 껌정 고무신 신고 농부들이 담아주는 고봉밥을 드시며 남도 땅을 누비다 56세의 연세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소천하신 선생님의 선친(Hugh Linton), 선친께서 음주음전 고속버스 기사가 일으킨 추돌사고로 사경을 헤매실 때, 선생님의 의과대학 학비를 벌기 위해 한 정유회사 간부들의 영어회화를 가르치던 선생의 모친(Royce Linton)께서는 오랜 세월 그 땅의 약한 사람들,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많은 힘을 소진하신 후였지요.
지금도 점잖은 자리에서는 표준말을 쓰지만 동향 순천의 친구들을 만나거나 할 때는 ‘거시기’와 ‘뭐시여’ 그리고 ‘잉’이 툭 튀어나온다는, 광주민주화운동 현장에서 영어통역을 자원하고, 우겨 문무대에 입소하고, 80년대 그 혼란의 한복판에서 한국 대학의 동급생들과 주먹다짐을 피하지 않으면서까지 ‘나는 양키가 아녀!’라고 외친, 한국형 앰뷸런스를 제작하여 보급하고 응급구조체계의 확립에 힘을 쏟고, 이제는 북한으로 눈을 돌려 그곳에 기초적인 의료용품을 공급하는 일 등으로 분주한 선생님의 이야기를 벅차게 읽었습니다.
한국에서 의과대학을 졸업, 의사국가고시에 합격하고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서 미국 의사면허 취득, 미국에서 선진한 병원체계와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사람들과 함께 얼마든지 잘 먹고 잘 살 수도 있었는데, “20년 넘게 한국인으로 살았지만 그것을 인정해주지 않는 한국 사람들이 새삼 서운하기도 했다”고 하셨는데, 왜 4년 만에 미국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가셨습니까? “내가 뛰어 놀던 고향, 집 앞의 커다란 느티나무, 정이 많고 순박했던 사람들, 언제나 나를 반겨주었던 그리운 친구들의 모습” 그리고 “어릴 적부터 깊이 박힌 한국 문화와 습성” “결정적인 것은, 미국 사람들은 도대체 그 맛있는 김치를 먹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까?
선생님, 감사합니다. 영어 못해 주눅 들고 이성적일 것을 다짐하다가도 어느 새 사소한 일에 흥분하고 있는 미국 땅의 어설픈 나그네 제가 선생님의 삶을 보며 ‘솔찬히’ 위로받았습니다. 아니, “나는 한국 사람들에게서 ‘뜨거운 정’의 소중함을 배웠다. 또한 선교사 아버지에게서 ‘나누는 정’이 더 소중하다는 걸 배웠다”는 선생님 말씀을 들으면서, 덤벙거리고 쉽게 열 받는, 그러면서도 남의 딱하고 어려운 처지에 금방 눈물 흘리며 손 내미는 한민족 사람들이 정 메마른 이 시대와 세대를 위해 부르심 받은 사실을 또 한 번 자각 받게 됐습니다. 아모르 에스트 비태 에센티아!
추신: 선생님, 우리 교회 해외선교개발원이 주최하는 가을 선교축제에 강사로 초대되실지 모른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긴 말 않고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