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사철-종사품

Parable of the Dancing God

sherwood 2008. 11. 13. 14:50

당신 때문에 너무 좋은 하나님

아버지의 춤 솜씨

백스터 클루거 지음/김성웅 옮김

 

제발 거절 좀 당했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을 봤는가? 넓디넓은 세상, 어딘가에는 그런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지만, 글쎄,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단절되거나 따돌림 당하거나 혹은 배제되는 걸 바라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좀 생뚱맞다.

우리는 거절당하길 싫어한다. 아프기 때문이다. 거절당해 겪는 아픔은 다른 아픔과는 좀 다르다. 열 살 먹은 여자애가 있다. 학교에서 팔을 다쳤다. 급히 병원으로 실려 갔다. 팔이 부러졌으니 얼마나 아팠을까. 의사는 주사를 한 대 놓고, 팔을 고정시킨 후 기브스를 했다. 여자애는 이제 괜찮아질 거다. 며칠 만에 학교에 돌아왔는데, 이건 완전히 영웅 같다. 반 친구들은 모두 기브스 위에 사인을 하고 싶어 할 거다. 이 애가 울면서 버스에서 내린다. 단짝 친구가 이 애를 놀리면서, 다른 친구들 앞에서 완전히 바보를 만들어버렸다. 엄마가 괜찮다고 말하지만, 엄마의 위로하는 말은 친구의 거절하는 말보다 힘이 없다. 이런 아픔을 달래줄 진통제는 없다. 조각 난 마음을 고정시키는 기브스는 없다. 이제 이 여자애는 학교에만 가면 교실에 혼자 남아 눈물을 흘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학교에는 가지만 상처 입어 간다. 이 상처 때문에 이 애는 마음 내켜하지 않고 삐딱하게 바라보며 망설이게 될 거다.

거절은 우리에게 이런 일을 한다. 거절 받으면 사람이 바뀐다. 삐딱하게 바라보고 이랬다저랬다 하다가 의심하게 된다. 이러다가 숨어버린다.

왜 거절의 상처는 깊게 남는 것일까? 거절의 힘은 우리의 설계구조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는 용납을 위해 지어진 존재이다. 용납될 때 우리는 살아난다. 고기가 물을 만나면 펄떡이는 것처럼, 사람은 용납 받으면 살아난다. 이게 우리 삶의 조건이다. 용납이 없으면 좋을 수가 없고, 그러니 행복할 리가 없다.

그 악한 자는 우리가 어떻게 설계됐는지 잘 안다. 이 자는 고기가 물 밖으로 내던져졌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안다. 게다가 용납이라는 울타리 밖으로 “내쫓겼을” 때 우리에게 벌어질 일도 안다. 이 자는 거절 전문가다. 이 자가 쓰는 제일의 전략은 용납 받을 수 없다고 확신시키는 것이다. 이 자는 계략 보따리를 풀어 우리는 공략하는데, 어떤 것은 노골적이고 다른 것은 교묘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뭐니 해도 이 자의 계략 중 가장 잘 먹히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앎을 슬그머니 바꿔놓는 것이다.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등을 돌리셨다, 아니면 우리를 아끼거나 가까이 하려 않으신다고 확신시킬 수 있다면, 이건 인생을 좌우할 만한 일이 된다. 방안에 틀어박혀 울고 있는 여자애를 떠올려보라. 눈 질끈 감고 극복해보려고 한다 치자. 그래도 그건 이미 상처 입은 사람으로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에서는 교제와 생명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아주 간단하다. 거절은 살아갈 수 있는 자유를 봉쇄한다.

예수만큼 용납의 힘을 잘 아셨던 사람이 있을까. 그분은 아버지의 포옹 속에서 자유와 즐거움을 누리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원한 기쁨 속에서 사셨다. 그분은 아버지가 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분이 아님을 알았다. 그래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그분의 아버지를 율법이라는 붓으로 먹칠을 하는 모습에 몸서리를 쳤고 몹시 불쾌해하셨다. 그래서 그분은 종교 지도자들이 가지고 있는, 아니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관한 생각을 고쳐주기로 하셨다. 우리가 아버지의 그 넉넉한 포옹과 용납을 분명히 깨달아 알고, 우리 존재의 핵심이 되는 이 자유와 즐거움을 앎으로써 제대로 살게 하려 하심이다.

누가복음 15장은 하나님에 대해 한참 잘못된 생각에 대한 예수의 직설적인 공격이다. 자, 예수의 말씀을 조심해서 들어라. 아버지의 사랑은 선하고, 그의 사랑은 열띠다.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흘낏 보는 것만으로도 당신 안에 자유와 즐거움이 불꽃처럼 타오를 수 있다. 당신이 오랫동안 꿈으로만 꾸어온 그 자유와 즐거움 말이다.

누가복음15장에 나오는 예수의 비유

아들 둘을 둔 사람이 있었다.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 제게 돌아올 몫을 지금 당장 받고 싶습니다.”

아버지는 그 둘에게 재산을 공평하게 나눠줬다. 둘째는 머지않아 짐을 꾸려 먼 나라로 떠났다. 허랑방탕 주색잡기에 빠진 그는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까먹었다. 돈은 바닥났는데, 그 나라 전체에 극심한 기근이 찾아왔다. 곤란이 닥치기 시작했다. 한 현지인에게 빌붙어 들판으로 나가 돼지를 치게 됐다. 배가 너무 고파 돼지 여물통에 있는 옥수수 속대라도 먹고 싶었지만, 그나마 주는 사람이 없었다.

궁지에 몰리자 정신이 되돌아 왔다. 혼자 이렇게 중얼거려봤다. “아버지를 위해서 일하는 품꾼들도 하루에 세 끼는 먹는데, 나는 여기서 굶주려 죽는 구나. 아버지에게 돌아가야겠다. 가서 ‘아버지, 제가 하나님을 거슬러 죄를 지었습니다. 아버지께도 죄를 지었습니다.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일용근로자의 하나로 여겨주십시오.’”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 집을 향해 떠났다.

아직 아버지 집에서 멀리 떨어진 거리였는데, 아버지가 그 아들을 봤다. 아버지 가슴은 뛰었다. 달려가서 얼굴을 맞부비며 아들을 껴안았다. 아들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 제가 하나님을 거슬러 죄를 지었습니다. 아버지께도 죄를 지었습니다.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아버지는 듣는 체 마는 체 했다. 하인들을 불렀다. “서둘러 가서 깨끗한 옷 한 벌 꺼내 와 둘째에게 입혀라. 가락지를 끼우고 신발도 신겨라. 살진 송아지를 잡아 구어라. 잔치를 열자구나! 흥겨운 잔치를 열어야겠다! 잃은 줄 알았는데 다시 찾았다!” 그 집에는 큰 잔치가 벌어졌다.

이 잔치가 벌어지는 동안 큰 아들은 들에 있었다. 하루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 근처에 왔는데, 풍악소리가 울려왔다. 어린 하인 하나를 붙들어 세워 놓고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어린 하인이 말한다. “막내 도련님이 돌아오셨습니다요. 주인마님께서 잔치를 열라고 하였습죠. 소도 잡았습니다요. 막내 도련님이 몸 상하지 않고 집에 오셨다굽쇼.”

형은 부루퉁한 표정으로 잔치마당을 엿보았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아버지가 와서 말을 걸려고 하지만, 듣고 싶은 마음이 아니다. 이 아들의 말을 들어보자. “아버지, 저는 수 년 간 이 집에서 아버지를 섬겼습니다. 아버지에게 상심을 드린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와 제 친구를 위해서는 잔치 한 번을 열어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함께 집안 재산을 말아먹은 아버지의 아들이 나타나자, 이런 큰 잔치를 베풀어주신단 말입니까?”

아버지가 말씀한다. “얘야, 오해하지 말거라. 너는 나와 항상 함께 있잖니. 내 게 다 네 것 아니니. 하지만 오늘, 얼마나 기쁜 날이니. 이런 날 가만히 있어야겠니. 네 동생은 죽었다 살아난 거야.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았다는 말이다!”

춤추시는 하나님에 관한 비유

누가복음 15장에는 예수가 베푼 비유 셋이 나온다. 그 중에서도 마지막 것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비유는 아버지와 두 아들에 관한 이야기다. 이 구도만으로도 비유는 우리에게 널리 사랑받는다. 항간에서는 이 비유를 “탕자 비유”라고 한다. 방탕한 아들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대단히 사실적이고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 대부분은 얼른 이 아들의 여정을 떠올린다. 그러나 이 비유에는 망종 아들 이야기에 비할 수 없는 훨씬 더 깊은 무엇인가가 있다. 그런 이야기라면 아들이 돌아오는 것으로 비유는 끝났을 것이다.

이야기는 이어진다. 이번에는 다른 아들이 무대에 오른다. 이 아들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면, 이 비유의 제목은 “눈 먼 아들의 비유” 혹은 “놓친 요점”쯤 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 이야기는 방탕한 혹은 눈 먼 아들에 관한 것은 아니다. 이 이야기는 아버지에 관한 것이다. 중심인물은 아버지다. 예수가 이 아버지, 그리고 이 아버지가 두 아들과 맺고 있던 관계를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에 관해 소름 돋는 진리를 드러내고 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가 어떤 분이신지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보여주는 이야기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다루는지 알려준다. 아버지의 마음과 즐거움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 즉 춤추시는 하나님에 관한 비유다.

예수는 상상할 수 있는 한 최악의 인물과, 바로 그런 자에게 달려가는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예수는, 이 처량한 죄인인 아들이 아버지의 절절한 바람과 지치지 않는 열정 그리고 사랑의 대상이라고 말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돌봄과 대가를 바라지 않는 용서의 대상이다.

예수는 하늘의 발코니에 서서, 행여나 돌아올까, 아들의 그림자 한 조각이라도 찾아 더듬는 하나님을 그린다. 이 아들을 보는 순간, 에게로 달려가서 껴안고, 아들을 위해 큰 잔치를 열라고 명령하는 아버지를 예수는 그린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에 대한 그림인가! 이보다 더 위대한 하나님에 관한 선언은 성경에 없다. “그가 아직도 먼 거리에 있는데,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서,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그 아들을 본 하나님이 주체를 못했다는 거다.

이 이야기를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 던지는 첫 번째, 아니 유일한 질문은 이것이다. 당신, 이 아버지를 만났는가? 이 비유에 나오는 하나님을 만났는가? 이분을 아는가?

여기서 예수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가? 애절한 얼굴빛으로 “하나님의 진면목을 알고 있는가?”고 말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가? 하나님에 관해 널리 알려진, 그러나 완전히 거꾸로 된 사람들의 인식과 싸우는 예수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가? “사람들이 그분을 만나고 그분을 안다면, 모든 것이 바뀔 것이다” 하고 말하는 예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가?

하나님의 진면목

예수는 이 비유를 앞의 것 두 개와 함께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정당한” 비판으로서 말씀하신 게 틀림없다. 제도화한 유대 교회의 거룩한 신학자들은, 예수가 죄인들을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못마땅하게 보았다. 부랑자들과 죄인들, 근본 없는 자들과 실패한 자들이 그에게 몰려들었고, 그는 그런 사람들을 오랜 친구마냥 대했다. 예수는 이 사람들을 보면 즐거워했다. 이들이 나타나면 흥이 올라, 함께 먹고 잔치를 열었다. 예수의 매사를 지켜보던 종교 지도자들의 눈에 이런 특이한 행동은 이내 적발됐다.

“죄인들을 맞아들이는 예수 선생, 당신이 얼마나 거룩한지는 모르겠소만, 어째 이런 자들과 어울릴 수 있단 말이오? 종교심이라곤 조금치도 없는 죄인들, 하나님을 망령되게 하는 자들을 어찌 받아들인단 말이오?”

예수의 반응을 조금은 느낄 수 있을 거다. 예수는 그들의 세밀한 조사와 판단에 놀랐다. 그러나 더 놀란 것은, 그들의 불신이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그렇게도 깨닫질 못하는가? 내가 왜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먹는지 정말 모른단 말인가?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니 나도 이렇게 하는 것이다! 내 아버지가 이 죄인들을 포옹하기 위해 달려가 그들과 함께 잡숫는 분이기에, 그들 위해 흥청망청 거리는 잔치를 여는 분이시기에 나도 그렇게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어 말한다. “그렇다면 이런 이야기를 들어보라.”

비유들은 이런 내용을 담고 있다. 예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는 가장 일반적인 관념, 그리고 그것 때문에 자신을 판단하는 바로 그 관념에 맞서고 있다. 그분은 그 관념이 모조리 틀렸다고 지적함으로써 그들을 소스라치도록 놀라게 한다.

이 비유들은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뒤틀린 하나님 관념, 그리고 그분의 일하심에 대한 예수의 정면 공격, 정공법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목록을 만들어서 누가 추잡스런 짓을 했고 누가 선한 일을 했는지 일일이 대조해보는 기록자라고 보았다.

죄인들은 씻을 수 없는 실패를 저지른 자들이라 눈곱만치도 기회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선대를 받기에는 전혀 자격이 없는 자들이다. 이 자들이 하나님을 위해 무슨 일을 했다는 건가. 사실을 말하자면 이 자들은 모든 하나님의 크고 작은 모든 기준에 미달되는 짓만을 한 자들이다. 이런 자들에게 심판이 내리지 않는다면 누구에게 내린단 말인가.

그러나 예수는 이 실패를 끌어안는 하나님을 말한다. 아버지의 참 아들, 아버지의 품에 안겨 있으며 아버지의 모든 면모를 아는 예수는 그들의 생각을 산산조각으로 만들어버리는 신학적인 커브볼을 던진다. 그분은 그들의 신학을 거꾸로 떨어뜨린다. 예수는 잘잘못을 기록하고 대조하는 저 높은 곳의 율법수여자가 아니라, 집으로 돌아온 낙오자 앞에서 기쁨을 주체 못해 춤추는 하나님의 모습과 맞닥치도록 그들을 내몬다. 죄인을 찾는 하나님, 그분의 호의를 입을 자격이 조금도 없는 자들을 위해 잔치를 여는 하나님과 마주치게 한다.

속전속결로 심판하는 하나님이 아니다. 한 손으로 올가미를 잡고 거기에 고개를 걸어 낚아 챌 죄인을 찾는 사형 집행자가 아니다. 예수가 본 하나님은 한결같은 모습으로 끈기 있게 흔들리지 않으며 자기 본 모습 그대로 남아 계시는 형언 못할 아버지다. 자기 자식들이 반항을 일삼고 어그러져 바른 길에서 멀어질 때에도 그러하신 아버지다.

아버지의 가슴에는 대차대조표 같은 건 없다.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용서를 위해 밟아야 할 단계 같은 것도 없다. 아니, 단계를 밟고 말고는 고사하고, 용서라는 말조차 여기엔 없다. 용서는 벌써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예수의 말로 옮기자면, “다 이루었다.”

이야기는 한 아들, 아버지의 아들이며 여전히 아들로 남아 있는 아들에 관한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아들이 아버지이며 여전히 아버지로 남아 있는 아버지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제 정신이 돌아온, 그래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맞닥뜨리고 있는 한 죄인에 관한 것이다. 자기에겐 집이 있고 아버지가 계시며, 흥청망청 낭비할 수 없는 유산이 있음을 새삼 깨닫고 있는 아들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 결코 변하지 않는 아버지의 마음에 관한 기쁜 소식을 알고 믿는 일, 바로 이것에 대한 이야기다.

둘째 아들은 먼 나라에서 눈물 속에서 지내야했다. 비참했다. 영혼의 뿌리가 뽑혔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수치심이라는 쓸개를 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좌절감과 무력감에 영혼이 떨었다. 과오를 간단하게 되돌릴 길이 없었다. 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이는 말이라곤 “아, 아, 아버지, 하늘을 거슬러, 그리고 아버지의 면전에서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들도 아닌 놈입니다. 고용인의 하나로 여겨주십시오.”

진한 모멸감과 저주받은 느낌뿐이었다. 이런 와중에도, 예수는 이 아들의 입에서 복음이 나오도록 한다. 아들은 깊은 비참함 속에서 스스로에게 복음을 말한다. 하지만 그 자신은 그것을 듣지 못한다. 아직은 중얼거림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에게 돌아가서.......라고 말한다. 자기가 알지 못하는 진리를 자기 입으로 말하고 있으니, 아직 어떻게 그것을 믿겠는가.

가진 것을 다 날렸지만 영원히 지속되고 변하지 않되, 마치 바위처럼 견고한 사실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가 말아먹을 수 없는 유산이 아직 남았다. 그에게는 아버지가 계시다.

“잘못했다 빌면 먹고살 자리 하나는 얻을 수 있겠지”하는 심정으로 열심히 연습하는 가운데, 땅이 떠내려갈 듯한 우레처럼 진리가 그를 엄습했다. 아버지는 그대로 아버지이셨다.

아들의 뇌리에, 자기가 아버지의 마음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이 스쳤다. 아버지는 아들이 하는 짓을 보고 아들을 사랑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아들이 거역하고 돌이킬 수 없이 실패한 점 때문에 아들 사랑하기를 그치지는 않는다. 아버지는 뭐가 어떻게 됐던 간에 아버지이시다. 아들은, 아버지가 여전히 그의 아버지이시고, 앞으로도 그러실 것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아들이요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 궁지에 몰린 청년은, 우리라고 다를 바 없지만, 종교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무엇인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가진 것을 다 날렸지만, 자기의 슬픔과 회개로 아버지 마음에 들게 점수를 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를 거슬러 가산을 탕진했지만, 애절한 후회와 한숨, 혹 겸손과 종교심이 굶어죽지는 않을 수 있을 정도의 일자리와 음식을 보장하리라고 생각한다.

이 아들, 지금 이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고 있다. 종교에 편승하면, 아버지의 동정심이 움직여질 것이라 생각한 탓이다. 하지만, 이 아들, 입조차 열 기회를 얻지 못했다는 것, 이 얼마나 충격적이고 영광스러우며 놀라운 일이냐. 눈을 들어보니 아버지가 달려오고 계시다. 달려오시는 아버지를 보자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정신이 들어보니 아버지가 자기 앞에 우뚝 서 계시다. 아버지가 자기를 끌어안고 얼굴을 맞부비시는 게 느껴진다. 아버지는 자기를 보고 너무 기뻐 춤을 추고 계시다.

예수는 말씀하신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며, 그분이 생각하고 행동하시는 바이다.”

이 젊은 친구, 아직 요점을 못 잡고 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가 아니라, 아직도 자기가 하는 일이 문제가 된다고 보는 게다. 자기와는 아무 관계가 없고, 오직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 데도 말이다. 이 아들, 아버지께 드릴 말씀을 열심히 연습했고, 거창하게 그 말을 꺼내놓을 참이다. 그리고 그렇게 한다. “아버지, 하늘을 거슬러, 그리고 아버지의 면전에서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들도 아닌 놈입니다. 고용인의 하나로 여겨주십시오." 본문이 뭐라 하는지 눈여겨보라. “그러나 아버지는 듣지 않았다”(저자는 유진 피터슨의 사역 신약성경인 ‘메시지’를 본문으로 삼고 있음을 참작하라).

장황한 양해의 말씀, 고백을 했으나, 아버지는 귀 기울이지 않으셨다. 아니,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셨다. 아들의 눈에는 춤추시는 아버지의 모습만이 보일 뿐이다. 들리느니 아버지의 외침뿐이다. “제일 좋은 옷을 꺼내다가 입히고, 신발을 내와 신겨라. 가락지도 끼워줘라. 고기 구울 불을 어서 올리어라! 잔치를 벌이자구나! 내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났다.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집에 돌아왔다.”

아버지의 성품과 하시는 일에서 은혜의 영광스러운 소식이 퍼져 나오고 있다. 복음이 그 아들을 둘러싸면서, 하려던 멋진 말을 가로막는다. 이 장면에서 큰 목소리로 선포된다.

“아들아, 네가 너를 어떻게 보느냐는 문제가 아니다. 네가 얼마만큼 가치 있느냐, 이것도 문제가 아니다. 내게 얼마나 점수를 따는가도 아니다. 네가 뭘 했고 뭘 실패했는가도 아니다. 내가 네 아비고, 그래서 내 아들이라는 거, 이것만이 문제다. 네가 아비의 참 모습을 알고 그래서 네가 누군지 알면 되는 거다. 넌 나랑 떨어져 있을 수 없다. 너의 참 모습을 네가 알면 되는 거다. 이 아비가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고, 아비 마음이 하늘의 할렐루야로 가득 차 있는지 알면 되는 거다. 나랑 너를 아비와 자식으로 맺어놓은 이 관계를 알면 되는 거야.”

하늘나라와 교회에 관한 언급

사람들은 성경이 하늘나라에 대해서 말은 많이 하지만, 정작 하늘나라가 어떤 모습일지는 말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늘나라가 어떤 모습일지 알기 원하는가. 하늘나라는 파티요 큰 잔치다. 아버지 하나님이 베푼 축하의 자리다. 그분은 앞장서서 춤추신다. 하늘나라는, 당신을 무자격자로 만드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영예로운 잔치의 손님으로서 아버지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비유 앞에 나오는 두 비유 중 첫 번째는 목숨을 건진 죄인들을 향하는 “하늘의 기쁨”에 대해 말한다. 두 번째 비유에서는, 죄인이 각성하고 자신의 완전한 무로부터 돌이켜 아버지께로 돌아올 때 하나님의 천사들이 잔치를 연다고 한다. 세 번째 비유에는 하늘의 기쁨 같은 게 언급되지 않는다. 잔치를 베푸는 천사들에 대해서도 말이 없다. 이 비유에는 오로지 춤추시는 하나님이라는 기막힌 그림만이 나온다. 버러지 같은 아들놈에게로 달려가서 끌어안고 얼굴을 부비는, 그리고 큰 환영연을 열라고 명령하는 아버지에 관한 생생한 이미지만이 있다.

이게 하늘나라다. 하늘나라는 하나님의 흥분이다. 역사 상 가장 큰 잔치 마당을 가득 채우고도 흘러넘쳐나는 아버지의 춤추는 기쁨이다.

지금 여기에 현존하는 교회가 닮아야 하는 모습이 바로 여기 있다. 하나님의 즐거움이 우리의 심장을 채우고, 축제를 만들어내야 한다! 현대 교회에 대해 말하면서, 우리는 자주 “모델”이라는 말을 꺼낸다. 그렇다면 여기 너무 좋은 모델이 있다. 잔치하는 교회. 복음전도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비유의 맏이 같은 사람들이 일을 끝내고 오자, 교회에서 풍악소리며 춤추는 소리가 들려온다. 웬 잔치판인가 하고 기웃거려 본다. 우리의 사명이 이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즐거움으로 가득 차고 들뜬 잔치의 사람들이 되라고 부름 받지 않았는가? 그래서 세상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보도록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종교

예수는 당시 제도화한 종교에 의해 걸러진 완전히 잘못된 하나님 이해에 맞서 이 비유를 말했다. 그분은 개혁과 혁명할 요량으로 이 비유를 말한 것이다. 장부 대조 신학의 사슬에서 살고 있던, 아니 살아보려고 아등바등하던 불쌍한 사람들을 해방시킬 뜻으로 말했다. 회개하라는 심각한 부름을 던지기 위함이었다.

나는 예수가 이 이야기를 울면서 했으리라 믿는다. 당시의 종교적인 사람들이 하나님의 잔치에 오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은 기분이 몹시 상했다. 예수는 이 비유에서 이 세상의 맏이들과 그들이 이 기회를 놓칠 것을 깊이 염려했다.

맏이에 대한 이 선언만큼 혀를 차게 하는 구절은 성경에 별로 없다. “큰 아들은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맏이는 부아가 나서 잔치에 함께 하려 하지 않았다.

예수는 왜 맏이가 부아로 끓었는지 말해준다. 그의 신학 때문이었다. 그는 장부를 대조하는, 실행 목록을 검사하는 아버지라고 생각한 분과 평생 관계를 맺어왔다. 나름대로 점수를 잘 관리해왔다. 성적표를 보면 과락이라곤 한 과목도 없다. “'나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고 있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는데, 내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 버린 이 아들이 오니까, 그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여기 벌어지고 있는 일을 봐라. 맏이는 모든 일을 한 치의 그르침 없이 다 했다. 순종하되, 완벽하게 했다. 규칙을 지켰다. “제게는 주신 게 없습니다. 게다가 먼 나라에서 창녀랑 놀아난 아버지의 아들이 돌아오자, 축하연을 하신다며 겅중겅중 뛰셨습니다. 체통을 지키셔야지요. 하인들 앞에서 둘째 때문에 목이 메이셨다고요? 위신 문젭니다, 아버지! 이건 공평하지 않습니다! 너무하십니다! 정말요!”

맏이가 지금까지 내내 아버지와 함께(교회 안에?) 머물렀는데도, 아버지의 마음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아버지의 표정이 어땠겠는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아버지는 경악하다 못해 비통한 마음이 됐을 게다. 마음이 갈가리 찢어졌을 게다.

“맏이야, 너 무슨 소릴 하는 게냐? 빗나가도 한참 빗나갔구나. 친구들과 파티 하도록 고기 한 점 주어본 적이 없다고 했지? 맏이야, 이게 다 네 거고 지금까지도 네 거였다. 알지 못했단 말이냐?”

다시 비유로 돌아가 보자.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는데,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아버지, 재산 가운데서 내게 돌아올 몫을 내게 주십시오 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살림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확실히 알았는가? 아버지는 재산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맏이에게 아버지 소유가 이미 돌아갔다. 재산은 이미 그의 몫이다. 그런데도 맏이는 재산을 얻으려고 그 오랜 세월 일을 해왔다. 이미 얻은 것을 손에 넣으려고 말이다. 그는 한 번도 그것을 누려본 적이 없다. 아버지 혹은 아버지의 자애로움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던 거다. 아버지 혹은 아버지의 풍성하고 분에 넘치는 선물을 누리지 못했다.

맏이야 말로 잔치하는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선물을 선물로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자기 식의 조건을 만들어냈다. 선물을 종교로 만든 것이다. 이미 주어진 것을 얻으려고, 지난 날 해온 일들을 유지하려고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 그리고 동생을 위해 베풀어진 큰 잔치에 대한 맏이의 분노, 아니꼬움은 단순한 격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맏이의 삶 전체가 이런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그것은 비비꼬인 신학과 그릇된 확신의 표출에 불과하다.

그는 은혜를 이해하지 못했다. 은혜를 기쁨 속에 즐기지도 못했다. 자애로운 아버지를 한 번도 누리지 못했다. 아버지 혹은 아버지 집에 거하는 삶을 까맣게 몰랐다. 아버지가 누구신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아버지 마음이 어디로 쏠려 있는지도 몰랐다.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고작, 이 일이 아주 공평치 못하다는 것밖에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잔치에 참여하지 않으려 했던 거다.

어느 시대건 종교의 사람들은 이 실수에 빠진다. 이 사람들은 자기들만의 용어를 만들어낸다. 자신들의 실수와 무익함을 자각하기보다는, 그래서 아버지의 온전한 은혜에 자기를 맡기고 넉넉한 안아주심에 안기기는커녕, 이들은 상상의 의미 규정이랄 수 있는 종교를 세운다. 그 규정 안에서 자신들이 썩 괜찮은, 종교적 신심이 있고 사랑할 줄 아는 인간들이라고 굳게 믿는다. 상태는 더 꼬이고 잘못 돼 간다. 파멸한 자들을 안아주고 받아들이는 아버지, 혹은 그들을 맞아들이되 마치 오랜 친구처럼 그렇게 하는 예수를 알 길이 없는 거다.

참 하나님과 그분의 기쁨 속에 감춰진 생명을 알 수 없다. 그들의 자기의가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또 누리게 하는 일을 가로막는다. 하나님이 베푸는 잔치에 함께 할 수가 없다. 아니,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자기들이 심각하게 뒤쳐진 사람들, 변화를 일으킬 도움도 힘도 없는 사람들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래서 종교에 기대는 거다.

포옹하시는 아버지와 그분의 넉넉한 잔치를 보는 순간,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어쩔 수 없이 환멸과 분노가 솟아난다. 종교인으로서 그 잔치에 함께 했다간 경탄하는 죄인들의 경이감은 목을 졸리고, 그 잔치는 하나님에 대한 “종교적인 봉사”라는 따분한 행사로, 핏기 없고 텅 빈 영광으로 전락하고 만다.

예수는, 그 아버지가 맏이에게 이렇게 말하려고 하는 듯 묘사한다. “얘야. 이 잔치는 너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아니, 이건 우리의 잔치야. 내 집에서는 이렇게 사는 거란다. 자, 이리 오너라. 너도 우리 식구 아니냐.” 아버지는 이 말을 굉장히 힘주어 하고 있다. 아버지의 애타는 마음을 전하기 위해 쓰인 그리스어는 파라카레오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성령의 능력 안에서 전하는 권면을 나타내고자 할 때 쓰였다. 예를 들어 고린도후서 5장20절을 보자.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대사들로서,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간절히 부탁하시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그리스도로 인해 여러분에게 애절히 간청합니다. 이 잔치에 꼭 오십시오”(저자의 첨가적인 번역).

아버지는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맏이에게 잔치에 참여할 것을 간청 수준으로 간절히 부탁하고 있다. 하지만 아들은 듣지 않을 것이다. 맏이는 이 청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에게는 스쳐가는 바람소리 같다. 그의 종교와 잘못된 확인 때문에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그는 성령님을 저항하면서까지 잔치에 가길 거절한다.

정직한 질문

뒤로 한 걸음 물러서서 이 모든 요점들을 정리해보자.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바는 무엇인가?

예수는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하나님 앞에 우리를 서게 한다. 이 하나님은 충격적이다. 예수는 모든 것을 돌려세운다. 우리가 보기에 하나님의 일에 푹 파묻혀 지내는 듯 보이는 종교적인 사람들은 끝내 참된 것을 놓치고 만다. 오히려 길을 잃고 실패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경탄해 마지않는다. 하나님은 잔치 마당의 한 가운데서 그들에게 자기의 즐거움을 펼쳐 보이신다.

우리는 이 이야기의 인물 가운데 누구인가? 정직하게 대답하기 위해서는 이 비유가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고 있는지 물으면 된다. 이 이야기를 읽거나 들을 때, 누군가가 우리 곁에 선다. 둘째 아들일 수도, 아니면 맏이일 수도 있다. 아버지 혹은 이 이야기를 전하는 예수 자신일 수도 있다.

이 인물을 밝혀내는 일은 참 중요하다. 우리를 탐구하고, 깊이 숨겨 있지만 우리와 우리의 삶의 방식에 깊이 영향을 미치는 속마음을 드러내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 질문은 소위 우리의 “실제 작용하고 있는 신학”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한다. 이 신학은 교회 혹은 성경공부를 할 때 말하는 신학과는 다르다. 실제 작용하고 있는 신학이란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 위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하나님에 관한 우리의 생각을 말한다. 이것은 우리 영혼의 생각이다. 솔직하게, 이 이야기를 어떻게 들었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봄으로써, 우리의 깊은 존재 안에서 진정으로 하고 있는 생각의 실체를 볼 수도 있다.

먼저 둘째를 보자. 자신이 둘째와 같다고 생각된다면, 멈춰 서서 자신의 인생을 한 번 정직하게 돌아보라.

자신의 오류와 실패 그리고 오만과 잘못 또한 낭비를 직시해보라. 그리고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보라.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가 하나님이시며, 마치 비유의 아버지가 둘째에 대해 생각하듯, 아버지로서 나를 생각하시는가? 내가 한 모든 일이나 하지 않은 모든 일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시고, 여전히 아버지로 남아주실 것이며, 나를 향해 주체 못할 연민을 느끼고, 감당 못할 기쁨으로 내게 달려와 나를 끌어안아 주신다는 게 정말 가능한 이야기인가?

하나님이, 내일 혹은 내가 죽는 날, 아니 내가 행동거지를 바로 하는 그 날이 아니라 지금 당장 오신다는 게 맞는 말인가? 그것도 내가 누구며 무슨 일을 했는지 낱낱이 아시는 분으로서, 제일 좋은 옷과 신발 그리고 가족임을 보여주는 가락지를 내오라고 소리치시는 분으로서 오신다는 게 맞는 말인가?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는 게 믿어지는가? 아버지 하나님이 당신을 향해 열띤 마음이시라는 게 믿기는가? 당신 위해 잔치를 열라고 명령하시는 게 믿어지는가? 지금 이 시간 이 하나님이 믿어지는가? 그렇지 않다면, 회개해라! 잘못 말한 거 아니다. 회개해라. 생각과 믿음을 완전히 바꿔라. 우리 아버지에 대해 떠도는 추악한 거짓말들에서 돌아서라. 저 위대한 선언을 망원경으로 보듯 봐라. 그가 아직도 먼 거리에 있는데,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서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이 구절을 암송하라. 여기 나타난 하나님을 믿어라. 이 진리를 먹어라. 마셔라. 즐겁게 머물러라. 우리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경탄하라.

맏이에게로 눈을 돌려보자. 당신이 꼭 맏이 같은 사람이라면, 종교성이라는 문제를 직면해야 한다. 정직하게 자문해보라. 내 종교가 하나님께 점수를 따는 데 도움이 되리라는 점을 믿어보려고 애쓰는가? 나의 선량함과 순종 때문에 아버지께서 나를 받아주신다고 보는가? 교회출석과 겸손과 죄의 고백을 보시고 하나님이 마음을 움직이신다고 생각하나?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내가 하는 종교적 행위와 어떻게든 연결돼 있다 보는가?

만약 그렇다면, 회개해라. 그렇다, 회개해라! 우리 아버지에 대해 떠도는 추악한 거짓말들에서 돌아서라. 저 위대한 선언을 망원경으로 보듯 봐라.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지 않느냐 ? 또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 아니냐?” 이 구절을 암송하라.

예수 안에서 이미 당신을 맞아들였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신 하나님과 여기서 마주친다. 이미 수중에 있는 것을 어떻게 손에 넣는다는 말인가? 자기를 그렇게 헐값에 넘기지 말라. 장부를 내려놓고, 아버지를 알라. 춤추시는 하나님이 베푼 은혜의 잔치 마당으로 오라. 이 잔치는 또한 당신을 위한 잔치이기도 하니까.

다음은 아버지에게로 눈을 옮기자. 이 이야기에 나오는 아버지 같은 사람이 당신이라면, 오만불손한 맏이가 그 잔치를 종교 전시장으로 만들지 못하게, 다시 말해서 교회를 장례식장으로 만들지 못하게 하라. 우리의 겸손과 예배 뒤에 숨어 도사린 자기 의에 빛나는 자만에 유의하라. 겸손한 사람이란 자기 실패를 알고, 하나님이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주저 없이 찾으시고, 그들을 끌어안고 아무튼 반겨 맞으신다는 사실 앞에서 놀라 할 말을 잊은 사람이다.

겸손이란 은혜를 수용하는 자세를 말한다. 아버지의 깜짝 놀랄 만한, 노력으로는 얻어지지 않는 예수 안의 포옹을 받아들이는 태도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자기들을 위해 하신 일에 취하기보다, 하나님을 위해 자기들이 한 일을 더 자랑스레 여기는 자들을 조심하라. 하지만 이런 사람들에게도 잔치에 와 달라 간청하기를 그치지 말라. 이 사람들에게도 이 잔치가 그들의 잔치라고 말하길 그치지 말라. 그리고 지평선을 눈에 힘주어 응시하라.

이 이야기를 전하는 예수가 떠올랐다면, 아직도 보지 못하고,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위해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가져라. 하지만 이야기를 멈추지는 말라. 교회가 이 메시지를 되찾기까지 이야기를 계속하라. 교회가 경악하는 교회, 하나님의 진면목에 화들짝 놀란 교회, 온 세상이 잔칫집 소리를 듣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듣고자 할 만큼 아버지의 즐거움으로 가득 찬 축하하는 교회가 될 때까지 계속 이야기를 이어가라.

아버지의 마음이 우리를 그렇게 놀라게 하시기를.

저자

C. 백스터 크루거는 신학자이며 저자로서 페리코레시스라는 사역단체의 총무로 섬기고 있다. 미시시피 프렌티스 토박이인 저자는 동네 꼬마들의 야구팀 코치 노릇을 좋아할뿐더러, 열심 있는 골퍼요 낚시꾼이다. 케이즈 클론이라는 낚시 미끼 줄을 고안하기도 했다.

백스터는 리폼드 신학교에서 목회학 석사학위를 받고, 스코틀랜드에 있는 애버딘 대학교의 킹스 칼리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대학 교목으로 일했고, 애버딘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한편 부목사로도 사역한 경험이 있다. 저자는 최근 미국과 해외를 돌며 설교와 강의를 하고 있다. 저자와 부인 베스는 백스터, 로라 그리고 캐슬린이라는 자녀를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