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sus Shock
경이와 충격을 자아내지 않으면
예수가 아니다
개독공원에 터진 임재의 도시락 폭탄!
성례전이라는 포장지를 뜯고, 그 안에 든 예수 현존의 선물을 지금 누리라
당신의 몸과 피 앞에서 히죽거리던 이 죄인을 용서해주십시오
복음주의자들의 빈약한 영적 상상력을 자극하고, 타성에 젖은 가톨릭교인들에게 호루라기를 부는 책
골수 복음주의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보스턴대학 철학과 교수 피터 크리프트의 한국어 최초 소개작
헌정사
나를 하늘 아버지께로 인도해주신 이 땅의 아버지께.
그리고 나를 이 땅의 아버지에게 태어나 자라게 하신 하늘 아버지께.
목차
1부: 일곱 갈래의 출발
2부: 데이터, 예수충격
3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충격
4부. 기초: 예수의 현존
5부: 우리는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6부; 일곱 갈래 맺음말
1부
일곱 갈래 출발
출발 #1
난감한 질문
이 책의 답변
이 책은 일곱 갈래의 서두로 시작된다. 이것들은 책의 서문 혹은 서론이 아니다. 이것들 자체가 이 책의 출발이기 때문이다. 이 갈래들은 모두 질문이다.
묻지 않은 질문에 답하는 것만큼 무의미한 일은 없을 것이다. 이 책은 두 페이지에 걸쳐서 답한다. 이 책의 다른 모든 것은 이 답의 일부일 뿐이다.
질문은 이것이다. 예수는 왜 가장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왜 사람을 황당하게 만드는 이름인가?
석가모니, 아니 무하마드, 아니 모세에 대해 말한다 해도 얼굴 찌푸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 대부분의 교육 받은 사람들, 근본주의자가 아닌 크리스천들은 비신자들에게 예수에 대해 말하길 힘들어 하는가? 그리고 왜 대부분의 비신자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미간부터 찌푸리는가?
내 말이 사실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그냥 회사, 혹은 이런저런 사람들이 섞여 있는 회사, 특별히 배웠다는 사람들이 많은 회사에 가서 실험해보라. 이 이름은 좌중을 얼어붙게 만들 것이다. 갑자기 침묵이 흐르면서 난감한 표정이 될 것이다. 볼멘소리를 들을 뿐 아니라, 느낄 수 있다. 냉기가 돈다. 혹은 열기가 오른다. 예전과 같지는 않다.
크리스천들이란 자신들로 인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 인해서 당혹해하는 작자들이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도 있다. 크리스천들은 예수의 이름이 비신자들에게 불러일으킬 당혹감에 민감하기 때문에 당혹스러워할 뿐이다. 그렇지만 이 이유는 이 수수께끼를 겨우 한걸음 정도 뒤로 물릴 뿐이다. 왜 비신자들은 이 이름에 그토록 당황스러워하는가? 왜 "예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중간지대를 인정하지 않는 이름으로 통하는가?
예수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섹스에 대해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섹스를 중화 中和해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가 섹스에 대해서 하는 말은 모두 "섹시"하거나 "섹시"하게 보이지 않도록 애쓰거나 이 둘 중 하나다. 이런 말들은 (1) 사랑에 관한 황홀한 언어이거나, (2) 외설스럽고 야비한 언어이거나, (3) 웃음을 자아내는 언어이거나(섹스와 종교는 가장 인기 있는 농담의 소재들이다), (4) 병리학에서 사용하는 대단히 냉철하고 과학적이며 기술적인 용어 중 하나다. 그렇다. 우리가 예수에 대해 사용하는 말들도 (1) 사랑의 언어거나, (2) 신성모독적인 언어거나, (3) 농담이거나, (4) 냉철하고 기술적이며 신학적인 언어다.
당신이 이런 생각을 전에는 해 본적이 없을 것이라 단언한다. 예수에 대한 말과 섹스에 대한 말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진다는 것 말이다. 왜 전에는 몰랐을까? 명백하면서도 흥미가 솟는다. 너무 지나친가? 너무 난처한가? 왜?
예수는 칼이다. 그는 나눈다. 당신은 그에 대해 중립적일 수 없다. 그러려면 당신은 그 무엇, 당신 가슴 속에 있는 그 무엇을 깊이 찌르려는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 무엇에 격정적으로 미치거나 격정적으로 거부해야 한다. 아니면 최소한 그 무엇에 넋을 잃을 정도로 당혹스러워야 한다. 크리스천들을 보면 이렇게 되는가? 기독교를 보면 이렇게 되는가? 아니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렇게 되는가?
왜 그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분열 책동자인가? 왜 그는 둥글둥글 돌아가는 세상을 각 지게 깎아내는가? 당신이 누구든 그리고 당신이 무엇을 믿거나 믿지 않던 간에, 그는 당신을 그 모서리에 올려놓기 위해 무슨 일을 하고 있단 말인가?
출발 #2
이 책의 성격
독자: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뭔가요? 이 책의 내용은 뭐지요?
저자: 이 책은 예수가 만들어 내는 다름에 관해 말합니다.
독자: 그가 무슨 다름을 만들어낸다는 거지요?
저자: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다름을 만듭니다.
독자: 그런 질문이라면 수많은 답이 있지요. 아마 수 천 권의 책도 나왔을 걸요.
저자: 아닙니다. 답은 하나예요. 단 하나의 답, 단 하나의 현상이 있습니다. 나는 이걸 예수충격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이 현상은 까맣게 잊혔습니다. 잊히지는 않았더라도 거기에 이름을 붙이질 못했어요. 이 책을 통해서 이 현상을 밝혀내고 이름을 붙일 겁니다.
독자: 나는 회의론자입니다. 2천 년이나 지난 마당에, 예수에 대해 달리 새롭게 할 말이 있을까요?
저자: 모든 점에 대해 새롭게 말할 수 있습니다. 지켜만 보세요. "와 보세요."
출발 #3
자가 진단지/ 설문
여기 자가 진단지가 있다. 당신 자신, 당신의 인생철학, 당신의 "세계관"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진단지가 이 책과 모종의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 진단지를 본 다음에 책의 내용이 전개될 것이다.
아래의 각 질문에 가능하면 정직하고 간결하게 답하라. 질문에 대해 생각만 하지 말고, 자신의 답을 써내려가라. 자신의 생각을 속이기는 아주 쉽다. 그러나 손으로 쓰고 눈으로 본 바를 속일 수는 없다.
먼저 열 가지 개인적인 질문이다. 당신의 사람됨에 관한 질문들이다.
1-3. 이 세상에 현존하는 인물 중 가장 위대한 세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1.
2.
3.
4. 좋은 일을 위해서든 악한 일을 위해서든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5-10. 당신의 삶에서 다음 영역에 문제가 생겼을 때 조언과 도움을 구하기 위해 가장 먼저 달려갈 사람은 누구인가?
5. 정신 건강
6. 결혼
7. 돈
8. 섹스
9. 가정
10. 직장, 직업
다음은 몇 가지 신학적인 질문이다.
11. 왜 하나님은 이 우주를 창조하셨는가?
12.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13.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14. 왜 죽음 이후의 삶을 믿는가?
15. 지혜를 얻는 비결은 무엇인가?
16. 어떻게 불한당이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가?
17. 당신은 어떻게 성도가 되는가?
18. 당신이 죽어 하나님 앞에 섰다. 그분이 묻는다. 내가 왜 널 천국에 들여보내야 하니? 당신은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19. 교회란 무엇인가?
20. 전쟁이라는 문제에 대한 해답은 무엇인가?
21. 사도바울은 열매가 많은 복음전도자였다. 무엇 때문에 그는 이런 사람이 될 수 있었는가?
22. 기독교는 세계의 많은 종교들 가운데 하나로 보인다. 어떻게 이 지역적인, 서구에 치중된, 유대인에서 나온 것이 모든 사람, 전체를 위한 종교가 될 수 있는가?
23. 기독교란 무엇인가? 기독교가 전파하고 말하고 주장하고 혹은 선언하는 것은 무엇인가?
다음은 철학적인 질문 몇 가지이다.
24. 진리란 무엇인가?
25. 당신의 삶은 방식을 정의해보라.
26. "삶"이란 무엇인가?
27. "죽음"이란 무엇인가?
다음은 심리학적인 질문들 몇 가지다.
28. 당신 인생의 존립 이유, 목표 그리고 목적은 무엇인가?
29. 권태를 물리치는 해결책은?
30. 당신의 진정한 자아를 규정해보라. 당신은 누구인가?
31. 당신의 정체는 왜 그리 신비스러운가?
32. 외로움을 물리치는 가장 좋은 방법은?
33. 지치고 힘들 때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마지막 두 질문은 지금까지의 모든 질문들을 요약하는 것이다.
34. 마지막 사도의 마지막 당부는 무엇이었는가?
35. 사람들이 가장 자주 범하는 계명은 무엇인가?
진단 점수
정직하게 답한 후에는, 솔직한 답을 적어 넣은 후에는, 점수를 매겨야 한다. 그런데 채점 기준은 무엇인가? 신약성경이다. 당신이 크리스천이라면, 정답이 많아야 할 것이다. 정답이 많지 않다면, 크리스천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아직도 더 배워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책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이 35개의 질문에 대한 신약성경의 답이 여기 있다. 볼드체로 된 게 답이다. 당신은 35개의 답을 똑같은 두 글자의 단어 하나로 요약할 수 있다. 그것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빌 2.9)이고, 이 우주를 초월하고 이 우주의 모든 권세를 초월하는 천사들조차 경배해야 하는 이름이다(빌 2.10).
1-3. 이 세상에 현존하는 인물 중 가장 위대한 세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찾고 있습니까?" (눅 25.5)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답을 쓰지 않았다면, 왜 안 썼는가? 하나님을 인격이 없는 분이라 생각하는가? 오직 인간만이 인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게 생각한다 하더라도, 왜 예수를 적지 않았는가? 당신은 그를 산 자가 아니라 죽은 자로 내심, 속마음으로는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닌가?
4. 좋은 일을 위해서든 악한 일을 위해서든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마 28.18).
이 질문에 대해 "예수"라고 답하지 않았다면, 그가 마태복음 28.18에서 말한 바를 진정으로 믿는 게 아니다. 이어지는 다섯 개의 질문에 "예수"라고 답하지 않은 이유도 아마 이것일 것이다.
5-10. 당신의 삶에서 다음 영역에 문제가 생겼을 때 조언과 도움을 구하기 위해 가장 먼저 달려갈 사람은 누구인가?
"나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광 가운데서, 그분의 풍성하심을 따라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을 모두 채워 주실 것입니다"(빌 4.19).
"모두"는 글자 그대로 모두다. "일부" 혹은 "종교적인 것만" 아니면 "초자연적인 것만" 아니면 "영적인 것만"이 아니다.
물론 그분은 인간적인 도구들을 사용하신다. 하지만 그분 없이 그것들은 힘도 없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요 15.5). 그러나 그것들 없이도 그분은 여전히 모든 권능을 행사하신다.
11. 왜 하나님은 이 우주를 창조하셨는가?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골 1.16)
예수는 단지 구세주만이 아니다. 그는 이 우주의 목적이다. 성육신은 마지막 몇 분을 남겨놓고 부랴부랴 고안해낸 해결책이 아니다. 아울러 승천으로 성육신이 끝나는 것도 아니다. 그분은 지금도 성육신해 계시다.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다. 우리와 계시되 단지 다른 방식으로 계실 뿐이다. 그분은 만물을 통해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그분은 만물을 창조하셨고, 그분 자신이 물 物로 성육신하심으로써 만물을 거룩하게 하셨다. 그분은 인간의 육체를 입음으로써 더욱 각별하게 우리와 함께 계시다. 그래서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 25.40)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성만찬에서 우리와 가장 완벽하게 함께 하신다. 우리가 성만찬에서 "이것이 나의 몸이다"하는 말씀을 우주 만물에서 메아리로 들을 수 있는 이유가 이것이다. 그리스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성만찬은 단지 상처에 붙여주는 반창고 정도가 아니라, 우주 의미를 여는 열쇠다. 하나님이 빅뱅을 일으키신 이유다.
12.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일찍이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나, 아버지의 품 속에 계시는 독생자이신 하나님이 그분을 나타내 보이셨다. (요 1.18)
베드로든 바울이든 어거스틴이든 아퀴나스든 모세든 소크라테스든 아리스토텔레스든 무하마드든 노자든, 그 어떤 사람이라도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을 얻을 때는, 그 지식은 그리스도, 로고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요 1.19)을 통해서 온다. 그는 하나님의 유일한 태양이시다. 하나님의 태양계 안에 있는 모든 다른 존재는 위성, 혹성으로서 그의 빛을 반사할 뿐이다. 이 태양계는 거기에 중심이 있기 때문에 하나의 계 系인 것이다.
13.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사람이다." (요 14.8-9)
이것이다. 더는 없다. 아버지는 예수 플러스알파가 아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은 감추질 못한다.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은 자신을 아들 하나님 안에서 남김없이 다 나타내셨다. 골로새서 1장 15-20절이 바로 이점을 말한다. 찾아봐라.
14. 왜 죽음 이후의 삶을 믿는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요 11.26)
죽음은 철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있는 문제다. 죽음의 해결책은 철학적인 논증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이다. 우리의 희망은 정확한 논증이 아니라, 신이며 인간인 한 사람의 신실함을 향하고 있다.
15. 지혜를 얻는 비결은 무엇인가?
16. 어떻게 불한당이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가?
17. 당신은 어떻게 성도가 되는가?
18. 당신이 죽어 하나님 앞에 섰다. 그분이 묻는다. 내가 왜 널 천국에 들여보내야 하니? 당신은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롭게 하여 주심과 거룩하게 하여 주심과 구속하여 주심이 되셨습니다." (고전 1.30)
그는 단지 우리의 지혜, 우리의 의로움, 우리의 거룩함 그리고 우리의 구속의 원천 혹은 원인만이 아니다. 그는 우리의 지혜, 우리의 의로움, 우리의 거룩함 그리고 우리의 구속이다. 이러한 추상적인 개념들이 예수 안에서 성육신 되었고 구체적인 현실이 됐다는 데 기겁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그분은 우리가 자기를 이런저런 관념으로 전락시켜버린 것에 기겁한다. 우리의 약한 믿음 때문에 실제로 예수는 충격을 받으신다(마 8.11-12, 막 6.6, 막 14.33, 요 9.30을 보라).
19.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함입니다." (엡 1.22-23)
교회는 조직체가 아니라 유기체다. 제도 institution이기에 앞서서 성육신 incarnation이다. 그는 이 조직의 보스가 아니다. 그는 이 유기체의 머리다. 빌 게이츠가 마이크로 소프트의 "머리"인 것과는 다르다. 두 어깨 사이에 털 달린 구체 球體를 당신 몸의 머리라고 할 때 바로 그 머리다. 당신의 몸이 바로 당신이다. 그분의 몸이 바로 그이다. 교회에 질렸다면,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하고 저 밑바닥에서 말씀하는 겸손한, 인간의 용모를 지닌 그 이의 말을 들어보라.
교회는 세상 안에 있지 않다. 그러나 세상은 교회의 활동무대로서 교회 안에 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길러내려고 우주를 만드셨다. 그리고 교회는 "성도들의 연합"이다. 우주는 성도를 배출하는 하나님의 기계다. 그리고 교회는 그 기계가 만든 생산품이다.
20. 전쟁이라는 문제에 대한 해답은 무엇인가?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은 것이 아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요 14.27)
그는 우리의 평화다. 다른 무엇도 평화가 될 수 없다.
세상, 육체 그리고 마귀와 타협을 통해 평화를 가져오려고 애쓴 흔적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웃, 자신 그리고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 하는 유일한 길은 세상, 육신 그리고 마귀와 전쟁을 하는 것이다. 예수가 한 일이 바로 이것이다.
21. 사도바울은 열매가 많은 복음전도자였다. 무엇 때문에 그는 이런 사람이 될 수 있었는가?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고전 2.2)
덜어버림이 넘침을 가져왔다. 예수에 덧얹은 모든 것이 예수를 희석해버린다. 모든 건전한 신학, 모든 진지한 도덕, 모든 아름다운 예배의식은 예수 안에서부터 나오는 하나의 표명이다. 그러나 모든 추악한 신학, 도덕 그리고 예배의식은 예수를 희석한다. 사도바울과 같이 "오직 예수"를 사람들에게 전한 복음전도자들은 세상을 변화시킨다. 예수가 저항 의지를 꺾어버리는 분이기에 그렇다. 그러나 예수에 끼워서 자기를 전하는 복음전도자들은 세상을 그다지 변화시키지 못한다. 인간은 만만하게 저항할 수 있기 때문이다.
테레사 수녀는 20세기가 낳은 가장 영향력 있고 존경받는 크리스천이다. 그가 다른 크리스천보다 아는 게 적어서였다. 그는 예수로 충분했다.
22. 기독교는 세계의 많은 종교들 가운데 하나로 보인다. 어떻게 이 지역적인, 서구에 치중된, 유대인에서 나온 것이 모든 사람, 전체를 위한 종교가 될 수 있는가?
"거기에는 그리스인도 유대인도, 할례자도 무할례자도, 야만인도 스구디아인도, 종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시요,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골 3.11)
기독교 = 복음, 성육신, 작가 자신이 작품의 한 등장인물이 된 이야기. 이 작가는 인간의 모든 연극을 쓴 작가다. 아니 온 우주의 작가다. 그가 희곡보다 작게 보인다. 그 자신이 성육신을 통해 희곡에 등장하기에 그렇다. 아니 그는 처음부터 아주 작은, 단세포 하나와 같은 모습으로 작품에 등장한다! 그러나 그는 우주보다 무한히 크시다. 그분이 작가이기 때문이다.
23. 기독교란 무엇인가? 기독교가 전파하고 말하고 주장하고 혹은 선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비밀은 여러분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요, 곧 영광의 소망입니다." (골 1.27-28)
기독교의 케리그마 kerygma 혹은 선포는 한 인격의 표출이다. 가능한 한 가장 짧은 문장으로 줄여본다면, "하악!"이다.
24. 진리란 무엇인가?
25. 당신의 삶은 방식을 정의해보라.
26. "삶"이란 무엇인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 14.6)
다시 한 번, 추상적인 개념에 손과 발과 입이 달린다. 다른 스승들은 돈, 진리 그리고 삶을 가르치지만, 그는 길, 진리 그리고 생명이다. 그는 그들이 가르치는 바로 그것이다. 그가 책을 쓰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는 어느 한 책을 지목하지 않았다. 그것들이 진리를 담고 있는 한 모든 책이 그를 지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27. "죽음"이란 무엇인가?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빌 1.21)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면, 죽는 것은 영원히 더욱 더 그리스도다. 당신이 그리스도 없는 인생을 살고 있다면, 영원히 더욱 더 그리스도 없는 죽음에 갇힐 것이다. 이것은 근본주의가 아니다. 모순 없는 법칙이다.
28. 당신 인생의 존립 이유, 목표 그리고 목적은 무엇인가?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엡 4.13)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성구를 애송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누군지 보여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지도 보여준다. 신의 의미만이 아니라 인간의 의미도 알려준다. 인생의 의미는 성장하는 것이다. 성장한다는 것은 좀 더 그리스도처럼 된다는 것이다.
29. 권태를 물리치는 해결책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고후 5.17)
"다 보았다"(전 1.14, 7.15). 이 말은 권태에 쩐 철학자가 뱉은 말이다. 그러나 그가 못 본 것이 있다. 그는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다. 그는 "해 아래 새 것이란 없다"(전 1.9)고 말했다. 그러나 있다. 그분은 해 너머에서 오셨다. 그리스도는 따분한 질문에 대한 답이다. "새로운 게 뭔가?" 그는 이렇게 답한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계 21.5).
30. 당신의 진정한 자아를 규정해보라. 당신은 누구인가?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갈 2.20)
십자가는 "나"를 지워버렸다.
이것이 삶의 비밀이다. 자아는 죽음으로써만이 산다. 자기망각, 자기 내어줌, 자기희생, 아가페 사랑으로만 나의 정체성(그리고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이 이런 분이셔서 그렇다. 현실이 이렇게 돼 있어서 그렇다. 도가 이런 것이어서 그렇다. 궁극적인 사실이 이것이어서 그렇다. "고결 무흠한 인간에서부터 막돼먹은 인간에 이르기까지, 자아는 버려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버려질 때만이 자아를 찾을 수 있다." (C. S. 루이스, 고통의 문제, "하늘") 세상의 모든 종교는 이 궁극적인 비밀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기독교는 이 궁극의 기초를 안다. 그것은 영원하신 삼위일체의 존재양식이다.
31. 당신의 정체는 왜 그리 신비스러운가?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골 3.3)
정체성의 위기가 있는 게 당연하다.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옛날 집을 허물면서 새 집을 세워 올린다고 하면 혼동과 흥분이 교차하는 삶을 사는 건 당연하다. 우리는 나비(그리스도)로 변하고 있는 애벌레(아담)다.
32. 외로움을 물리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혼자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크리스천들은 그 이유를 안다. 그들은 그 누구를 알고 있다.
33. 지치고 힘들 때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마 11.28)
영적 고갈은 육체의 고갈보다 더 을씨년스럽다. 그리고 영적인 안식은 육체적인 쉼보다 훨씬 날아갈 듯 가볍다.
그분은 당신에게 탈진 속에서도 깊은 안식을 준다. 다섯 살 난 내 딸이 곧 죽는다고 생각했을 때, 어찌 해볼 수 없는 정서적인 고갈이 느껴졌다. 그러나 광풍이 이는 바다의 심연에 내려진 흔들리지 않는 닻이 있음을 알았다. 그 닻은 그분이었다. 수면을 때리는 미친바람은 잦아들지 않았지만, 닻줄은 배를 꽉 붙들고 있었다.
34. 마지막 사도의 마지막 당부는 무엇이었는가?
35. 사람들이 가장 자주 범하는 계명은 무엇인가?
"이분이 참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어린 자녀 여러분, 여러분은 우상을 멀리하십시오." (요일 5.20-21)
하나님은 이 계명을 정교하게 배열하신다. 소중한 것이 먼저 나온다. 이 계명은 우리를 위해, 우리의 필요를 위해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첫 번째 것은 참 생명, 영원한 생명이다. 이 생명은 오로지 참되신 하나님 안에만 있다. 거짓 신들을 숭배하는 것이 그토록 참혹한 이유가 여기 있다. 거짓 신을 섬기는 것은 당신을 죽이는 음식을 목구멍으로 밀어 넣는 것이다.
기독교의 핵심 주장은 이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되신 하나님이고 영원한 생명이다." 그를 대신하는 우상들, 그를 대체하는 우상들이 있다. 요즘의 우상은 나무 돌 혹은 쇠붙이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돈, 섹스 그리고 권력으로 만들어진다. 더 미묘한 것들로 만들어진 우상들도 있다. 이런 것들의 일부는 당신이 35번의 빈 칸에 적어 넣은 것들이다.
이 자가진단의 요점은 무엇인가?
예수가 요점이다. 모든 것이 그분 안에서 하나의 요점을 이룬다.
신약성경은 이 35개의 질문들을 똑같은 방식으로, 예수라는 단 하나의 단어로 처리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우리가 지닌 모든 질문들에 대한 하나님의 단 하나의 답이다. 아무리 멋져 보이는 답이라도, 다른 답을 내놨다면, 당신은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신약성경이 35개의 질문에 대해 내놓은 단 하나의 단어와 같은 단어를 내놓지 않았다면, 아래의 기도를 드리라고 권한다.
그 우상이 어떤 것이었든
제게 가장 귀한 그 우상을
당신의 보좌에서 끌어내리게 해주소서
그 후에는 오로지 당신만을 섬기게 하소서
-윌리엄 카우퍼 William Cowper 1772
파스칼은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하나님을 알뿐더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자신을 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할 때만이 삶과 죽음을 안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우리의 삶 혹은 죽음의 의미, 하나님 혹은 우리 자신의 의미를 알 수 없다." (팡세)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그가 영면하기 직전의 일이다. 한 수도사가 한밤중에 수도원 채플의 바닥에 엎드려 기도하는 그를 훔쳐보게 됐다. 수난상에 달린 그리스도의 입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토마스야, 네가 나에 대해서 썩 잘 썼더구나. 그래, 어떤 상을 주랴?" 토마스가 놀랍도록 지혜롭게, 겸손하게 그리고 너무나도 뻔뻔스럽게 대답했다. "주님, 오직 주님 자신을 주십시오."
이 책은 당신을 파스칼과 아퀴나스의 지혜 앞으로 조금 더 가까이 데려가려고 한다.
출발# 4:
당신은 이 책을 읽어야 하는가?
또 하나의 자가진단.
당신이 이 책을 읽어야 할 필요를 밝히는 아주 간단한 진단이 여기 있다.
아래 문장을 읽어라. 20세기 가장 위대한 기독교 작가의 글이다. 이 문장에 내가 "예수쇼크"라고 부르는 이 책의 모든 요점이 담겨 있다. 이 문장을 읽은 후에는, 이어지는 질문에 예/아니오로 답하라.
우리는 어떤 추상적인 신 관념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넘어가길 꺼려한다. 내 생각에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깊이 뿌리박힌 범신론과 전통적인 이미지에 대한 거부감이 있어서 그렇다. 사람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관념을 싫어한다. 바닥까지 내려가서 보면, 그분이 사람으로 그려지기 때문이 아니라, 왕 심지어는 전사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범신론자들의 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뿐더러,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 신은 마치 책장에 꽂힌 책처럼, 당신이 아쉬울 때 거기 있다. 그 신은 당신을 추격하지 않는다. 지켜보는 그의 눈길을 피해 죽자 살자 도망해야 하는 위험도 전혀 없다. 만약 신이 이렇다면, 신을 왕으로 그리는 모든 기독교적인 이미지들은 역사적인 실책이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이 실수로부터 정화돼야 한다. 하지만 이런 이미지들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임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충격이다. 당신은 낚싯줄이 당신의 손을 끌어당길 때처럼, 어두움 속에서 무엇인가가 당신 곁에서 숨 쉬고 있을 때처럼 충격을 받는다. 맞다. 우리가 지금까지 좇아온 실마리를 따라 삶의 전율이 전달돼 오는 바로 그 순간에 이 충격이 온다. 혼자라고 생각했던 그곳에서 살아있는 것을 만난다는 것은 언제나 충격적이다. "저것 봐!" 우리는 외마디 비명을 지른다. "저게 살아 있네." 바로 여기서 수많은 사람들이 주춤거리며 물러선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에 관해서는 진전이 없는 것이다. "인격이 없는 신." 괜찮다. 아름다움, 진리와 선함 등 우리 머릿속에 있는 주관적인 신. 한결 낫다. 우리를 통해 나가는 무형의 삶의 힘, 그러나 우리가 조절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능력. 최고다. 그러나 하나님은 줄의 한쪽 끝에서 잡아당기는, 무서운 속도로 접근하고 있는 살아있는 사냥꾼, 왕, 남편이다. 이런 하나님은 완전히 다른 범주다. 도둑놀이를 하던 아이들이 갑자기 조용해진다. 현관에서 진짜 발자국 소리가 들린 건 아닐까? 취미삼아 종교("인간의 신 추구!")에 관심을 갖던 사람이 흠칫 놀라 물러선다. 정말 그분을 발견한 건 아닐까? 그러려던 것은 정말 아니었다. 더 나쁜 경우는 이것이다. 그분이 우리를 찾아냈다면?
그렇다. 루비콘 같다. 건너든 건너지 않건 둘 중 하나다. 그러나 건넌다 해도, 기적이라는 안전보장은 없다. 어떤 일이든 각오해야 할지 모른다.
(C. S. 루이스, 기적, 11장)
아제 위의 문장에 대한 당신의 취사선택 테스트가 기다리고 있다. 이 글에 대한 당신의 반응을 가장 정확하게 묘사한 것의 박스에 체크하라.
□ 이해 안 됨. 작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나는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 반발.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안다. 하지만 이대로 되지는 않을 거다. 이런 종교를 피하기 위해서 전속력으로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겠다.
□ 놀람. 제대로 이해했는지 잘 모르겠다. 작가가 말하는 것을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놀랍고 끌려든다. 그리고 호기심이 발동해 알아보고 싶다.
□ 갈망. 이해한다. 그리고 간절히 원한다. 이 작가가 서 있던 자리로 나도 끌려가고 싶다.
□ 인정. 이해한다. 나도 이 작가가 말한 그 자리에 서 있다. 이 주님이 나의 주님이다. 내 영혼의 연인이다. 나는 그분을, 그분의 임재를, 그리고 우리의 관계를 영원히 탐구하길 원한다.
이 책을 읽고 유익이 되려면 어떤 박스에 체크해야 할까?
어디에 해도 괜찮다.
출발 #5
세 번째 자가진단
이번 진단은 한 가지 질문이다.
개신교 종교개혁이 제기한 가장 뜨거운 논쟁은 무엇이었는가? 개신교와 가톨릭 간, 개신교 여러 교단 간을 가리지 말라. 이 논쟁에서 상대들은 서로를 이단 정도가 아니라 마귀라고 서슴지 않고 불렀다.
답: 종교개혁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믿음으로 의롭게 됨 Justification by Faith이 아니었다. 물론 저 질문은 어떻게 구원받느냐, 어떻게 하늘나라에 들어가느냐 만큼 중대하다. 종교와 정치의 관계가 아니었다. 이것은 물론 삶 혹은 죽음의 문제였다(진짜 그랬다. 격전지에서 교수대 앞에서). 성경의 충족성, 혹은 교회의 타락, 혹은 성경과 교회의 관계가 아니었다. 교황과 교회의 정치가 아니었다. 마리아 혹은 성인들 혹은 천사들 혹은 연옥에 관한 것도 아니었다. 성육신 혹은 삼위일체 혹은 속죄가 아니었다.
그것은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실제 임재에 관한 것이었다.
그 이유를 헤아리기란 어렵지 않다. 가톨릭교도들은 개신교도들을, 이 세상에서 맛볼 수 있는 그분과의 친밀하고 전적인 연합의 초대를 거절한 자들이라 몰아붙인다. 그들의 몸과 영혼의 문들을 꼭 걸어 잠그고, 주후 30년 이스라엘의 거리들을 돌아다니실 때처럼, 진실 되게, 실제로, 정말로, 그리고 전심으로 그 문들에 노크하고 계시는 그 신인 神人을 거절하는 자들이라고 고소한다. 그런가 하면 개신교도들은 가톨릭교도들이, 역사상 가장 터무니없는 우상숭배자들, 빵 앞에 고개 숙이고 포도주를 경배하는 자들, 요술이라도 쓰는지 한순간에 물질을 신으로 바꿔치기 함으로써 기독교를 이교사상으로 변질시킨 자들이라고 맹공을 퍼붓는다. 이 문제에 관해서 틀린 쪽은 정말, 너무도 심각하게 잘못된 것이다.
이 책은 이 질문에 관한 것이다. 성만찬 신학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실제 임재에 관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실제 임재는 "예수쇼크"의 원인이며 원인에 대한 규명이다.
출발 #6
이 책의 집필 동기
이 책은 지적인 무기력증에서 태어났다. 나는 작가들이 빠지는 수렁에 꼼짝 못하고 갇혀 있었다. 보스턴 대학의 성 마리아 채플이 만들어내는 성스러운 어두움 속에서 행해진 성만찬에 계신 그리스도 앞에서 나는 옥죄며 텅 빈 마음을 쏟아놓았다. 그리고 거기 계시는 그분을 향해 몇 분간 말 없는 기도를 올렸다. 드디어 내 입술이 질문을 내놓았다. "제가 무엇에 대해 쓰길 원하십니까?"
즉시 응답이 왔다. "나에 대해서."
순간 혼동이 물러가고 그 자리에 결심이 들어왔다. 그렇게 하여 이 책은 내 정신의 오염된 아기집 속에 착상됐다. 그때 나는 "당신의 말씀대로 제게 이뤄지게 하소서"하고 말했다. 나는 40권의 책을 그분을 위해서 썼으나, 이제 한 권은 그분에 대해서 쓰려고 한다. (이 책을 구체화해서 탈고하는 데까지는 십 년이 걸렸고, 그 중간에 다른 책 15권이 출간됐다. 쉽게 밀고 나갈 수 없었다. 마치 나무처럼 내 앞에 버티고 있었다.)
획기적인 진보였다. 8살 때 기막힌 생각이 내게 떠오른 이후부터 쭉 품어온 그 비할 데 없는 지혜를 마침내 다시 떠오르게 된 것이다.
일요일 오전 우리 식구들이 교회에서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나는 그 장소를 정확하게 기억한다. 뉴저지 주, 프로스펙트 파크, 8가, 헤일던 거리. 그 거리를 지나면서 나는 갑작스레 아버지께 이런 말씀을 드렸다. "아빠, 교회랑 주일학교에서 배우는 거는, 진짜로는 딱 하나지요, 그치요?" 그 순간까지 내게 종교는 마치 우주처럼 골치 아프고 복잡한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드디어 "만물 이론" 즉 종교에서의 통합장이론을 발견한 것이다.
"딱 하나라고? 그게 뭔 소리냐?" 아버지는 내가 무슨 소리를 하나 하시는 표정으로 물으셨다.
"그러니까요, 딱 하나만 생각하면 다른 건 다 오케이라는 거예요. 그냥 예수님한테 묻는 거예요. 내가 뭘 하길 원하세요? 그리고 그걸 그냥 하는 거예요."
아버지는 놀란 눈으로 나를 돌아보셨다. "음, 맞다, 아들. 네 말이 정말 맞다." (아버지는 참 현명한 분이셨다.)
거기서부터 언덕길을 내려오는 내내 갈수록 태산이었다.
물론 그 생각은 성령님이 주신 생각이다. 내 생각이 아니었다. 그러나 세상에 단 한 가지 사상만을 전할 수 있다면, 이 생각을 전할 것이다. 오직 한 권의 책만을 쓸 수 있다면, 바로 이것이 그 책이 될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에게는 오직 한 생각, 한 말씀인 예수만 있다. 예수는 하나님의 전적인 표명, 아버지의 완전한 계시다.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모든 충만함을 머물게 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골 1.19)
교황 요한 바오로는 우리에게 이점을 기억하게 하려고 했다. 예수는 "질문 빼면 아무것도 아닌 인생에 주어진 해답"이다.
그는 황금 열쇠다.
출발 #7
황금 열쇠
조지 맥도널드 George MacDonald의 "황금 열쇠" The Golden Key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동화다. (톨킨도 이 동화를 가장 좋아했다.) 동화들이 다 그렇지만, 이 동화도 소원 성취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나 다른 소원 성취 이야기들과 달리, 이 동화는 열쇠가 아니라 문을 달라고 한다. 두 주인공 마시 Mossy와 탱글 Tangle은 서두에 열쇠를 발견한다. 이야기는 이 열쇠로 열 수 있는 문 또는 문들을 달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풍유 諷諭다. 황금 열쇠는 그리스도다. 이 마스터 열쇠는 모든 문을 연다. 이 열쇠는 2천 년 전에 이미 우리에게 쥐어졌다. 우리는 이 열쇠를 쥐고 있다.
여기서 끝나지는 않는다. 우리 인생은 이 열쇠로 열 수 있는 문들을 달라는 요청이기 때문이다. 앞에 나온 설문들은 35개의 문들을 보여줬다. 하지만 그만큼만 있는 건 아니다.
열쇠와 자물쇠라는 풍유는 대단히 역설적이다. 열쇠는 자물쇠라는 문제를 푸는 목적에 대해 수단이 된다. 즉 문을 여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어떤 목적에 대한 하나의 수단이 아니다. 그는 존립, 궁극적인 존립이요 요체며 목적이고 의미이며 우리 삶의 총결산이다.
따라서 황금 열쇠인 그리스도가 우리 삶의 닫힌 많은 문들을 열 때 일어나는 일은, 마치 자물쇠에 열쇠가 꽂히듯 그가 상황에 끼어들어오는 정도가 아니다. 그는 우리 삶이라는 덩어리에 든 하나의 구성요소가 아니다. 심지어 "핵심적인" key 구성요소도 아니다. 그는 "길"이며 "생명"이다(요 14.6). 만물이 그 안에 든 구성요소다. 그는 로고스, 하나님의 정신, 모든 생명의 저자이며 연출자다. 셰익스피어가 "햄릿"의 한 구성요소는 아니지 않은가!
아래는 우리가 그를 보는 일반적인 방법을 보여준다.
(1) (2) (3)
그리스도라는 "열쇠" 나 자신 내 인생, 내 인생의 문제, 곧 "자물쇠"
그래서 우리는 세 가지 관계를 생각한다. 위 삼각형의 세 변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 내 신앙, 그리스도와 나의 관계, 내 종교, 내 "영적인 삶"
(2) 내 "세속적인" 혹은 "사회적인" 삶
(3) 내 문제에 대한 그리스도의 해결책
그러나 아래 그분과 인생을 바라보는 정당한 방법이 있다. 진리가 있다. 진리는 내가 아니라 그분이 규정한다. 나는 사물을 처음 도표처럼 보지만, 그는 두 번째 도표처럼 본다.
그리스도 내 모든 문제를 포함한 인생나 자신
내 인생의 모든 부분에서, 나는 이렇게 말씀하는 그분을 본다.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마 14.17) 저 현존하는, 살아있는 그분의 말이 "예수쇼크"다. 우리가 평소 듣지 못하는 말이므로 쇼크다. 이 말을 들을 때, 이 말은 침묵을 깨고 나와 우리를 놀라게 한다. C. S. 루이스가 든 예화의 아이들처럼 도둑놀이를 하고 있었을 뿐인데 현관에서 난 진짜 발자국 소리를 듣고 놀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 모두는 어떤 신학자와 조금 비슷하다. 그가 죽자 하나님께서 하늘나라에 들어가든지 아니면 하늘나라에 관한 강의에 들어가든지 선택하라고 하셨다. 그는 강의에 들어가기로 했다. 우리 모두는 약간은 욥의 친구들을 닮았다.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지는 않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끊이지 않고 조잘거린다. 이와는 반대로 욥에게는 하나님의 부재가 임재의 한 형태다. 그래서 욥은 기도했다. 자리에 없는 사람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 자리에 있어야 말도 하는 것이다. 그래도 자리에 없는 누군가에 대해서는 말한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누군가에 대해서는 말하는 법이 아니다. 배워먹지 못한 쌍놈이라면 모를까.
그분은 어디에나 계시기에 속된 것이란 없다. 따로 물질적인 것은 없다. 그분이 성육신이시기 때문이다. 별달리 신적인 것은 없다. 왜냐하면 그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유별나게 인간적인 것도 없다. 그분이 사람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사람, 그리고 영과 물질의 분리는 그분 안에서 모두 극복됐다. 그분은 죄 외에는 모든 것을 통합하신다.
두 번째 도표를 다시 보라. 이 도표에는 세 선이 사라졌다. 오직 한 선만이 있다. 만사가 그분과의 관계다. 만사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두 세계를 오가는 상업 트럭들이 달리는 고속도로다. 만사가 천사들이 올랐다 내렸다 하는 야곱의 사다리다. 그분이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가 그분에게 간다. 이게 인생의 의미다. 인생은 양쪽 끝이 뚫려 있는 하나의 튜브다. 이 튜브를 통해서 우리는 소통하고 만난다. 우주는 하나님에게 연결되는 거대한 휴대전화이다.
황금 열쇠라는 이미지도 안 맞는다. 열쇠는 문을 엶으로써 문제를 푸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원칙적으로 우리의 해결책이 아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의 "해결책"인가?) 그분은 우리의 천상의 연인이고 주님이다. 삶에서 부딪치는 모든 "문제들"은 그분과 우리의 결혼생활, 사랑 행위, 전희 前戱의 일부다. 프랜시스 톰슨 Francis Thompson은 고전이 된 시 "천국의 사냥개"에서 이렇게 썼다. "제 어두움이 그러니까 애무하려고 내민 그분의 손 그림자였단 말입니까?"
삶의 모든 것들이 그래야 마땅하다. 그분은 그 모든 것들에 대해 상대적인 분이 아니다. 그것들이 그분에 대해 상대적이다. 만물이 그렇다. 그분은 하나님이고, 하나님은 절대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다. 그는 우리에게 문제를 주는 분이다. 우리의 문제는 그분의 임무요 기회다. 그분의 가르침이며 우리의 배움이고, 그의 뜻이며 우리의 성화다. 그 문제가 잃어버린 귀걸이 같이 작든, 죽음 혹은 (죽느니만 못한) 이혼처럼 큰 것이든, 모든 일은 그분이 우리에게 던진 사랑줄(생명줄이 있듯 사랑줄도 있다)의 그 어디엔가 붙어 있다. 그분은 우리의 우주적인 타자, 우리가 항상 대화를 나누고 있는 분, 그 줄의 다른 끝을 당기고 있는 이이다. 보든 못 보든, 믿든 못 믿든, 우리는 언제나 그분이라는 샅바를 붙들고 있다. 우리의 문제, 인생, 죽음, 친구, 가족은 샅바가 아니다. 이것들은 우리와 함께 그 줄에 달려 있는 것들에 불과하다. 그분은 줄의 끝에 계시다. 먼저 세상을 떠났거나, 차마 용서받지 못할 짓을 했거나, 심각한 곤경에 처한 자녀를 두었는가? (어떤 문제, 어떤 "닫힌 문"도 부모에게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문제 해결이라는, 슬픔 완화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당신의 문제는, 아무리 커도(혹은 아무리 작아도), 당신을 향한 그의 지혜롭고 사랑스러운 뜻이다. 지혜롭거나 사랑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순간에도 말이다. 문제는 그의 섬세한, 허락해주는 뜻이다. 그리고 문제에 대한 당신의 반응이 그분에 대한 반응이다.
이 절대의 하나님이 우리의 상대적인 세계로 들어올 때, 문제와 무감각과 죄로 가득 찬 세계로 들어올 때, 우리는 어떤 쇼크와 비교할 수 없는 쇼크를 먹는다.
2부
테이터: 예수충격
나는 소크라테스, 예수를 만나다 Socrates Meets Jesus는 책을 썼다. 책의 말미에 소크라테스는 하버드 신학대학원의 동료 학생에게 황당한 질문을 던진다. 그는 여차여차해서 하버드 신학대학원까지 왔다. 2400년을 훌쩍 넘어 5900킬로미터를 서진해 온 것이다. 그는 근대적인 교수들과 헷갈려하는 동료 학생들에게 소크라테스 특유의 정직한 질문을 던지고 진리를 찾을 때까지 묻기를 멈추지 않으면 기독교에 발을 담그는 줄로 알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하버드에서 역사의 인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현존으로서 예수를 만났다(그 장의 제목은 이것이다. "조심하라. 그건 살아 있다!). 그의 황당하게 하는 질문은 이제 이것이다. "크리스천들은 모두 어디 있는가?" 기독교 국가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이 신학대학원에서 만난 사람들이라도 크리스천 아니겠는가. 그런데 왜 그들은 모두 위장을 하고 있는가?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이 전부 크리스천이라면, 당신들 중 일부가 크리스천이라면, 어쩌면 그렇게 천편일률적으로 살 수 있소? 용모도 똑같고, 말도 똑같고, 생각도 똑같을 수 있소? 이 믿기 힘든 게 사실이라면 어째 당신들의 삶은 그렇게도 밍밍하오?"
기독교가 진실이라면, 모든 것을 바꾼다. 그리스도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들어보자.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계 21.5). 지금까지 제작된 영화 중 가장 감명 깊은 영화인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The Passion of Christ에서 가장 감명 깊은 대사를 기억하길 바란다.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로 향하던 그리스도가 자기 어머니를 보며, 자기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왜 하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와 피와 비애가 왜 필요한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보세요, 어머니. 제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이 대사를 기억할 때 콧날이 찡하길 바란다. 머리에 닿고, 귓가를 울릴 뿐 아니라 마음에까지 가 닿길 원한다.
그리스도는 만나는 모든 인간 존재를 변화시켰다. 아니 그는 역사를 바꿨다. 코코넛 열매를 가르듯 역사를 갈라 주전과 주후라는 틈으로 영원을 밀어 넣었다. 변하지 않고 그를 만났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분을 전혀 만나지 않은 것이다. 당신이 그를 만질 때, 당신은 번개를 만지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번갯불에 덴 자국을 찾고 있기에 어리둥절한 것이다.
권태
"충격적이다"는 말은 "따분하다"는 말의 반대다. 내 생각에 예수는 그 누구도 결코 따분하게 하지 않은 역사상 유일한 인물이다. 이것은 신앙의 진리가 아니라 경험적인 사실이다. 그가 한 중심적인 주장, 즉 기독교의 중심 주장을 믿어야 할 이유 가운데 하나가 이것이다. 그는 말 그대로 육신을 입은 하나님이시다. 물론 이 말은 충격을 일으키는 근본적인 이유다. 그것도 비교할 수 없는 충격을 일으키는 이유인 것이다. 맥베스가 뱅코의 유령이 아니라 셰익스피어 자신을 만나고,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프로도가 간달프가 아니라 톨킨을 만난다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모든 사람의 반응을 그린 그리스말은 사우마 thauma, 즉 "경이"다. 이것은 그를 죽인 원수들의 반응이었고, 그를 경배한 제자들의 반응이었으며, 심지어 고개를 흔들며 이렇게 중얼거리며 지나친 회의론자들의 반응이기도 했다. "이 사람처럼 말하는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 만약 그가 그 자신이길 포기하고 하던 말을 멈췄다면, 이들 회의론자들은 살해자가 돼서든 경배자가 돼서든 그 곁에 섰을 것이다. "예수충격"은 당신의 심장을 둘로 쪼개고 그 어떤 반쪽을 따라야 할지 선택하도록 등을 재촉한다.
권태는 오늘날 우리가 앓는 중요한 심리적 문제의 하나다. 그래도 전문가들 중 이를 인정하는 사람은 적다. 권태가 폭력과 전쟁의 원인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른 누군가를 죽이면서, 혹은 죽일 계획을 하면서 따분해 하는 사람은 없다. 텔레비전 뉴스가 막 일어난 국지전 소식을 전할 때 갑자기 얼마나 재미있어지는지 기억하는가? 전쟁의 심리적인 뿌리가 권태감에서 오지는 않는지 헤아려볼 생각은 안 했는가? 지하실에 모여 앉은 유령 같은 아이들이 따분해 하며 무의식적으로 난장판을 찾아는 모습을 못 보는가? "어제는 별로였어. 내일은 뭐할까?" "좋은 수 있어. 군바리 옷들 입고 와. 총 가져오고. 넓은 데 나가서 서로 쏴 죽이는 거야." "오예! 기찬 아이디어삼!"
아이들이 있다면 따분함이 얼마나 해로운지 잘 안다. 아이들을 얌전하게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아이들을 계속 흥분시키는 것이다. 아이들 관리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이것이다. 아이들은 따분해지면 언제나 사고를 친다.
잠깐, 어른들은 큰 아이들에 불과하다. 사회화의 단면을 보면 즉각 알 수 있다. 아이들과 마찬가지다. 어른들의 행동을 조금이라도 개선할 수 있는 희망이 있다면, 생각할 것도 없이 그들의 주목을 끌어야 한다.
난잡한 섹스는 대단한 권태 치료제다. 로마제국 후기를 방불케 하는 우리 문화는 섹스와 폭력이 난무한다. 따분함에 절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
습관성 권태, 하루 열 시간씩 장작패기와 같은 조잔한 일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닌 권태, 마치 하늘처럼 모든 것 위를 덮고 있는 그런 권태는 죄를 유도하는 데서 그치지만 않는다. 이런 권태 자체가 죄다. 중세인들은 이를 "태만"이라고 불렀다. 일곱 가지 큰 죄 중 하나다. 태만은 단순히 게으름이 아니다. 사실 태만이 꼭 신체적인 게으름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선한 일을 앞에 놓고도 의지와 의욕이 움직이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영혼이 영적인 음식을 섭취하길 거부하는 상태다. 폭력은 영적인 불량식품이고, 권태는 영적인 식욕부진이다.
어디 가면 영적인 태만을 찾아볼 수 있을까? 동네 교회의 주일아침 예배에 가보라. 개신교든 가톨릭이든 관계없다. 이어 가장 가까운 운동장에 가보라. 조기축구회든 프로 구장이든 상관없다. 이 두 장소에 대한 관여도, 열정, 에너지, 마음의 투자를 비교해보라. 이 두 장소에 영적인 것은 얼마나, 또 자아에 관한 것은 얼마나 들어가 있는가? 나부터 고백하겠다. 나는 하나님을 응원하는 팬이지만, 거의 언제나 레드 삭스 야구팀의 극성팬이다. 마귀가 무너진 것보다는 뉴욕 양키즈가 패했을 때 더 큰 환호성을 지른다. 나는 바보천치다. 이게 원죄라는 말이 지닌 의미 중 하나다.
교회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모른단 말인가? 우리가 이 세상의 주관자에게 역모를 꾸미기 위해 모였다는 걸 모른단 말인가? 유다 지파의 저 큰 사자가 우리를 만나기 위해 변장을 하고 교회로 들어온 걸 모르고 있단 말인가? 까맣게 모르고 있는 거 같다. 안다면, 애니 딜라드 Annie Dillard가 이런 글을 쓸 필요가 없었을 게다.
왜 교회에 나온 사람들은 그 절대자를 향해 패키지 관광을 떠나 흥분한, 그러나 아무 생각 없는 관광객들 같은가?........ 우리가 대체 어떤 권능을 향해 이토록 맥없이 뇌까리고 있는지 희미하게나마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교회는 화학 실험도구들을 가지고 바닥에 앉아 놀고 있는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일요일 아침을 망치려고 하는지 화학 재료들을 섞고 있다. 밀짚모자 그리고 주단 모자를 쓰고 교회에 오는 것은 미친 짓이다. 충격 완화 헬멧쯤은 써줘야 한다. 안내자들은 연명 도구들과 조명탄을 나눠줘야 한다. 회중 의자에 우리를 꽁꽁 묶어야 한다. 그 잠자던 신이 어느 날인가는 깨어나서, 우리를 결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까지 끌고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극점 원정" An Expedition to the Pole)
왜 우리는 권태로울까? 뭐가 빠진 것일까?
쾌락은 아니다. 우리 현대인들은 상습적이고 성공적인 쾌락주의자들이다. 그러나 일단 따분해지면 어떤 강도의 쾌락도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쾌락의 정반대말은 고통이 아니라 권태다. 따분함으로 가득 찬 인생을 펄떡 뛰는 것으로 바꿔놓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고통도 감내하는 우리다. 이래서 전쟁이 흥미를 끄는 것이다. 그리고 전쟁에 문명을 섞어놓은 대체물들인 스포츠와 도박도 그렇다. 이 둘은 종교의식을 거행하는 듯한 위험도 내재돼있다.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높은 비율로 자살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돈을 많이 벌면 인생이 예측가능해지고 통제할 수 있게 되면서 따분해진다. 놀랄 일이 없는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
권태의 반대말은 무엇인가? 쾌락, 아니고, 행복, 아니다. 그렇다. 기쁨이다. 기쁨에는 언제나 놀람, 때로는 충격조차 들어 있다. 기쁨의 반대말인 분노, 격분, 공포 그리고 테러 역시 쇼크다.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언제나 기쁨 아니면 그 반대를 경험한다. 하늘나라 혹은 지옥을 시식한다. 예수를 만나는 모든 사람이 기쁨을 얻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행복하지는 않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쇼크를 먹는다.
설교는 대개 지루하다. 예수는 보통은 설교를 하지 않는다. 그는 무엇을 하시는가? 춤을 추신다. 궁극적으로, 그는 자신의 무덤 위를 밟고 춤춘다. 그가 부활절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난 게 아니다. 그는 부활절 이후 매일 영원히 일어난다. 스프링 달린 인형이 솟구치는 상자와 같다. 성경은 팝업 북이다. 조금 무딘, 덜 상징적인 언어를 써서 표현해보자. 예수는 우리가 편안해 하는 범주들을 늘 산산조각 내고, 우리의 간당거리는 기대감을 언제나 훌쩍 넘어서버린다. 그분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데, "은혜"는 도덕적으로 좋은 것만이 아니라 미학적으로 좋은 것도 끌어안는다. "재능"뿐 아니라 "스타일"도 담는다. 그분은 쇼팽 야상곡의 우아함, 마이클 조던의 슬램덩크의 수려함으로 충만하시다. 그분은 하나님의 최고도 놀람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놀람이다. 먼저, 창조다. 창조할 이유가 없다. 창조는 전적으로 잉여다. 어떤 이방종교도 무에서부터의 만물 창조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스 철학자들이 유대인들과 크리스천들로부터 이 개념을 처음 들었을 때, 그리고 단지 옛 자재에 새 형태를 얹어놓는 게 아니라 무에 유를 부여한다는 말로 무슨 뜻인가 이해했을 때, 이 사상을 미친 생각으로 치부했다. 창조에서는 모든 것인,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하나님이 마치 모든 것이 아쉬운 양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분은 그분 자신으로부터 나오며, 그분 자신보다는 한없이 작은, 그러나 실재하는 우주를 창조하신다. 그리고 존재 자체는 아니되 존재하는 것들, 실재이신 분과는 분명히 다른 실재들을 창조하신다. 이러니 수 천 년 동안 범신론자들은 질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범신론이 얼마나 합리적인가 알아야 한다. 만물과 만상의 원인이 되는 존재(Being)와 다른 존재가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이성적인 철학자들은 언제나 범신론의 유혹을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적인 의미에서 그리고 예기라는 의미에서는 이성적이지 않다. 차라리, 하나님이 이성적이라 하느니 하나님이 미쳤다고 하는 게 훨씬 더 진리에 가깝다. 누가 하나님을 미쳤다고 하면 그분이 그저 웃으시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분을 합리적이라고 할 때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이맛살을 찌푸리실 것이다.
그분은 물질만이 아니라 천사들, 무수한 영적 인격들, 그분과는 다른 자아들을 지으셨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의 "나" 외의 것들이 있을 수 있는가? 이것은 참으로 이성적이지 않다. 힌두교도들과 불교도들은 실성한 신비주의자들이 아니다. 그들의 형이상학은 전적으로 이성적이다. 힌두교에서는 오로지 하나인 "나," 즉 브라만만이 있다고 한다. 불교는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그런데 성경은 수 십 억이 있다고 한다!
다른 영적 존재들을 창조했다는 것만으로도 미친 소리인데, 그분은 이어 우리를 창조하셨다. 영이면서 짐승인 것들도 있다. 천사들이 숨도 쉬고 번식도 한다. 생각하는 유기체가 있는가 하면, 죽는 영적 존재도 있고, 죽지 않는 짐승들도 있다. 유원인들처럼 우리는 번식하고, 자고, 그리고 죽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치 하나님처럼, "내가 말이야"하고 말한다. 우리는 존재론적인 모순어법이다. "옥시모런" (모순어법, oxymoron)이라는 용어는 섭리로 지어진 농담의 말이다. 우리는 옥슨(황소, oxen)과 같은 동물이며 동시에 영적인 모런(천치, morons)이기 때문이다. 죄는 이처럼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어리석은 것이다. (플라톤과 같은 합리주의자가 이 생각을 그야말로 상상할 수도 없는 개념이라 결론내린 것은 정말 멍청하다. 그는, 모든 악은 무지에서 나온다, 나쁜 사람들은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행복이 그들이 피해버린 선한 삶에만 있다는 것을 단지 모르거나 깨닫지 못한 것이라고 아주 합리적으로 주장한다. 이 사상은 얼마나 합리적인가! 그러나 우리는 경험에 비추어 이것이 사실이 아님을 안다.)
하나님의 미침에 대해 할 말은 더 있다. 그분은 저기서 그치지 않고 이 영적인 옥시모런들, 이 "이성적인 동물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고, 이들로 하여금 그분 자신과 사탄, 하늘나라와 지옥, 빛과 어두움, 삶과 죽음을 선택할 수 있게 하셨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가? 우리가 그 원수를 선택하면, 하나님은 그렇게 하도록 놔두신다. 그리고 우리의 자유를 영원히 존중해주신다. 어떻게 그리도 위험하게 하실 수 있냐고? 그렇게 안 하셨으면 어땠을까. 뱀이 에덴동산 근처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울타리로 막으셨더라면 어땠을까.
그분은 우리가 역사상 가장 천치 같은 결정을 하도록 놔두셨다. 악마의 과실 선전에 놀아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건 그렇고, 맥킨토쉬 컴퓨터 때문에 화가 나서 대체 어떤 인간이 이런 웬수 같은 물건을 고안해냈노 하는 생각이 든다면, 모니터 위의 제조사 상표를 확인하기 바란다. 한 입 베어 문 사과가 아닌가.) 그 다음에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는가? 지금까지의 미친 짓들을 합친 것보다 더 미친 짓을 하셨다. 현자, 성자, 철학자, 신비가, 사람, 천사, 악마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다. 그는 인간의 접합포자, 태아, 아기, 소년, 청소년, 남자 그리고 시체가 되셨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서 먼저 천사를 보내셨다. 그 천사는 한 계집아이가 그분의 어머니가 되길 수락하도록 겸손하게 기다려야 했다. 하나님은 자기 어머니에게 태어나도 좋으냐고 허락을 구할 만큼 신사다! 전능하신 하나님, 무한한 영, 영원한 삼위일체의 두 번째 인격께서 영원히 동물의 내장을 획득하셨다. (승천이 성육신을 취소하지 못한다.)
그런 다음 그분은 자신에게 인간의 영혼뿐 아니라 우리의 입과 장부 臟腑를 부여하셨다. 마치 빵 한 덩어리처럼 보이는 그 무엇이 되셨다. 이게 바로 그분이다. 나는 이 사실을 믿지 않는 대부분의 개신교도들을 정말 가엽게 생각한다. 거의 믿겨지지 않는다. 사제가 하나님을 당신의 왼손에 쥐어준다. 당신은 오른손 엄지손가락, 집게손가락으로 전능자 하나님을 집어 든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삼킨다. 그가 당신의 위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미친 소리다. 성육신만큼 미친 소리다.
99.9999999999 퍼센트 믿기 어렵다. 그러나 성육신과 마찬가지다. 부모에게서 말하는 법을 배우기 전까지는 말할 줄 모르던 이 아기, 온 몸에 말초신경이 퍼져 있던, 그래서 배고픔과 피곤함을 느끼고 피가 나고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은 이 사람, 이 사람이 "거룩하신 하나님, 거룩하고 권능에 찬 이, 거룩하고 영생하는 분," 모든 시간과 공간에 말씀하며 물질을 존재케 하신 영원하신 창조주의 영원한 말씀이다.
어떻게 이점을 믿을 수 있겠는가? 오직 그분 자신이 우리에게 믿을 수 있는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기적일 뿐 아니라, 이 사실을 믿을 수 있게 하는 우리의 믿음 또한 기적이다. 정직하게 생각하는 크리스천이 거의 믿기 힘든 것을 믿는다는 게 기적이다. 정직하지 않은 믿음, 거짓 믿음에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 몰지각한 믿음, 어리석은 믿음, 오해한 믿음, 기독교를 쉽게 믿을 수 있는 무엇, 즉 "하나님은 당연히 계시고 예수님은 친절한 분이시며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로 착각한 믿음 역시 기적을 일으키지 못한다. 그러나 정직하면서도 생각하는 믿음은 문자 그대로 기적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리뿐 아니라 그것을 믿을 수 있는 능력도 주신다. 봐야 할 새 것뿐 아니라 볼 수 있는 눈을 주신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런 것을 우리 스스로가 믿을 수 있었을까? 경건하고 지성적인 구약 시대의 유대인에게 다가가서, 니케아 신경을 믿을 수 있겠는지 물어보는 광경을 상상해보라. 그러나 한 번 믿게 되면, 이것처럼 아름답고 소중한 사상은 출현한 적이 없었음을 알게 된다. 우리의 정신의 자궁에 이런 사상을 수태시킨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이점에 관해서는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바 있다(철학적 단상, 2장 말). 어리석은 소인배들은 하나님이 자기들만큼 어리석고 작다고 믿을 수 있다(이방종교의 다신론적 신화). 아니 하나님만큼 자신들이 위대하고 지혜롭다고 믿을 수도 있다(범신론적 신비주의).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신다고 믿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하나님이 마치 사람이 필요한 것처럼 행동하신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스스로 복 되시고 완벽하신 분이,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사람 손에 살해당하도록 인간이 되고 자신을 내어줄 만큼 사람에 연연하신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나님이 어떤 증표도 주지 않는다면, 그 점을 의심이나 해볼 수 있었겠는가? 착상도 할 수 없고, 믿을 수도 없고, 가능하지도 않으며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따분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J. B. 필립스는 근사한 제목이 붙은 좋은 저작을 남겼다. "당신이 믿는 하나님은 너무 작다." Your God Is Too Small 누가 나서서 "당신이 믿는 하나님은 너무 따분하다"는 제목의 책을 써야 한다. 예수는 역사상 사람을 지루하게 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었기에, 당신이 믿는 예수가 지루하다면, 당신이 믿는 예수는 진짜 예수가 아니라 말할 수 있다. 길들여진 사자라면, 그 사자는 C. 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에 나오는 사자 아슬란 Aslan이 아니다.
소화도 안 되고 그렇다고 되뱉어낼 수도 없는 위 속의 쇳조각을 우리는 어떻게 했는가? 하나님이 일으킨 이 기적에 대한 반응으로, 인간도 똑같이 놀라운 기적을 만들어냈다. 예수는 물을 포도주로 바꿨지만, 우리는 포도주를 다시 물로, 복음서의 그 취하게 하는 포도주를 물컹거리는 포도젤리로 바꿔놓았다. 그는 불을 붙이기 위해 왔지만, 우리는 그 불을 꺼버리는 방법을 발견했다. 그는 우리에게 충격을 주기 위해 왔지만, 우리는 교회, 혹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교회다움이라는 피뢰침을 통해 그 충격이 고스란히 빠져나가게 해버렸다. 그는 우리에게 좋은 세균에 감염되게 하려고 왔으나, 우리는 해독제를 찾아냈다. 천연두의 대항 수단은 우두다. 강한 감염을 막기 위해 같은 균으로 약한 감염을 시킨다. 이렇게 해서 강한 감염과 싸우는 항체를 만들어낸다. 폭발력 있는 종교의 대항 수단은 핏기 없는 종교다. 그리스도의 대항 수단은 "기독교적인 것"이다. 그리스도가 사용한 명사의 대항 수단은 우리의 알량한 형용사다.
성경만큼 매력적인 책은 없다. 그런데 성경을 해설해놓은 대부분의 책들보다 덜 재미없는 책은 없다. 교회를 위한 투사들만큼 끔찍스럽고 깨기 힘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잠결에도 교회를 주워섬기는 사람들보다 졸리고 하품 나오는 사람들도 없다. 그리스도의 말은 그의 원수들이 그를 살해하는 계기가 되었고, 제자들에게는 순교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의 말은 양편 모두를 안도시키고 그들 모두를 졸리게 한다. 그는 세상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세상을 어벙벙하게 만든다.
토마스 데이 Thomas Day는 왜 가톨릭교도들은 노래 할 수 없는가? Why Catholics Can't Sing?라는 진지하지만 재미있는 책을 썼다. 하지만 그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를 놓쳤다. 우리는 종교에 심드렁해져서 노래하지 않는다. 신사고를 하는 가톨릭교도들은 노래꺼리가 없어서 노래하지 않는다. 믿음이 참한 가톨릭교도들에게는 노래꺼리가 있어서, 노래한다. 그러나 그들조차 매우 다른 스타일들로 노래한다. 어떤 이들은 음악적으로 훌륭하게 노래하지만, 어떤 이들은 입을 틀어막고 싶을 정도로 기괴한 소리를 낸다. 그러니 스타일은 그들이 노래하는 이유는 아니다. 그들은 노래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이다. 그를 만날 때, 노래하지 않을 수 없다. 까악 거리는 소리밖에 못 낸다 해도 말이다.
나폴레옹의 병사들은 프랑스 국가 "마르세예즈"를 목청 터져라 불렀다. 노래를 잘해서가 아니라, 프랑스와 나폴레옹을 향한 큰 믿음과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루터는 종교개혁 때 그의 신학이 아니라 그의 찬송가로 독일을 얻었다. 미국남부의 흑인노예들은 감미로운 영가를 불렀다. 그들에게 큰 믿음과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왼발은 땅을 딛고 있지만, 그들의 오른발은 이미 하늘나라에 닿아 있었다. 불이 타오르는 게 당연하듯, 사랑하는 사람이 노래하는 것도 당연하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약해진 곳에, 노래도 약해진다.
노래하는 믿음의 사람들을 찾아라. 더 좋은 것은 당신이 속한 믿음의 공동체를 노래하는 공동체로 만들어라.
아름다움
왜 우리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창백하고 허약하고 따분할까? 아름다움에 민감하지 않아서 그렇다.
아름다움은, 진리 그리고 선함과 함께, 영혼이 먹는 세 가지 음식 중 하나, 인간에게 있는 가장 활달한 욕구 중 하나다. 진, 선, 미 이 셋은 우리 모두가 무한히 그리고 절대적으로 원하는 세 가지다. 이것들은 우리의 본성 자체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하나님의 세 가지 속성이다. 이것들은 우리를 동물들 위에 있게 하는 세 가지 이상이다. 이것들은 또한 모든 사람들을 아연실색하게 하는 복음서의 예수가 지닌 세 가지 인성 특징이다. 그의 굳건하고 실천적인 지혜, 따듯하고 동정에 넘치는 사랑, 빠져드는 창의성과 예측불능을 생각해보라. 그는 진실하고 선량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는 멋지기도 했다.
크리스천들은 이 첫 두 분야에서는 크게 진보했고, 지금도 큰 진보를 이루고 있다. 기독교 철학은 철학들 가운데서도 가장 지적이다. 기독교가 말하는 도덕은 모든 도덕이론들 가운데서도 가장 신성하다. 그러나 기독교는 세상에서 가장 미려하고 압도하는 예술을 주도하고 있지 못하다. 현대인들은 기독교가 멍청하거나 사악해보여서가 아니라, 따분해보이기 때문에 기독교를 거절한다. 멍청하고, 비릿하고, 황당하고, "경직돼 있고," 가냘프고, 밍밍하고, 반동적이고, 밋밋하고, 말만 많고, 지루하고, "기죽어 있고, 파리하고, 평면적이고 재수 없다." 기독교는 더 이상 감동적인 장면이 아니다. 기독교는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세상의 매체들은 지금 매직 쇼를 보여주고 있다.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문제는 훨씬 깊다. 언론방송계 혹은 예술계를 찾는 크리스천은 거의 없다. 아니, 그곳을 사도적 부임지 혹은 선교지 혹은 격전지로 보는 크리스천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곳은 그런 곳이다. 우리가 세상을 잃은 그 격전지가 바로 거기다. 앞으로 싸워 다시 찾아와야 할 실지 失地가 바로 거기다.
밭은 추수해야 할 만큼 익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풍요롭고, 효율 높고, 막강하고, 영리하고, 지식으로 무장해 있으나 추잡하다. 우리는 늘어선 쇼핑몰들 안에 살면서 아름다움은 박물관에 숨겨놓았다. 박물관에 살면서 추잡함과 뚝 떨어져 살았으면 좋으련만. "진보"라는 말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보기 바란다. "아뇨, 진보를 멈출 수는 없어요"하는 말을 들을 때는, 아름다운 무엇인가가 막 파괴된 후라고 확신해도 좋으리라. 우리 문화는 머리와 빈 가슴으로 채워져 있다. 굶어 죽어가는 경이감과 지갑을 밀어 넣은 것이 우리의 문화다. 사실에 대한 목마름은 해결해줬지만, 의미와 신비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다. "괜찮은" 사람들을 양산했지만, 영웅들을 길러내지 못했다.
아름다움, 그리고 아름다움이 이끌어내는 사랑과 경이감과 매력은 인간 욕구의 기본이다. 아름다움은 장식품이 아니다. 그런데도 대중들은 아름다움을 무시한다. 아니 속된 예술계가 아름다움을 팔 걷고 나서서 미워하고 겁주고 공격까지 한다. 예술기금은 여러 프로젝트들을 재정적으로 후원하지만, 거개의 프로젝트들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아름다움에 대한 증오, 일반인들의 취향과 심미적인 배고픔에 대한 속물적인 경멸이 그것이다. 예술계 인사들은 아름다움이라는 성지에 맞서 성전 聖戰을 펼치고 있다.
아름다움을 반대하는 결사항전 투사들은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이 격전지가 얼마나 중요한지조차 우리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케이크의 크림이 아니라, 삼단 켜다. 아름다움은 진리와 선량함이 결혼하여 낳은 자식이다. 우리를 진리로 빠져들게 하는 "진리의 광휘"(요한바오로 교황의 저서 제목)며, 거룩으로 홀려들게 하는 "거룩미"(시 29.2)다. 아름다움은 하나님이 지니신 것들의 하나다. 아름다움은 "여호와의 영광"(20세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가톨릭 신학자 중 한 사람인 폰 발타사르 von Balthasar의 저서 제목)이고, 어거스틴의 잠 못 드는 마음을 훔친 "옛적부터 있으나 항상 새로운 하나님의 미"다. 아름다움은 자석이다. 우리의 영혼의 쇠붙이다. 아름다움을 감지하는 순간, 우리는 쏜살같이 빨려든다.
아름다움은 권태에서 구해준다. 아름다움이 사랑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그것을 볼 때마다 우리의 고개를 돌려놓는다.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돌리기 때문이다. 마음이 여자와 같다면, 고개는 남자와 같다. 남자가 여자의 머리이긴 하나, 여자는 남자의 심장이다. 여자가 남자의 마음을 돌리기 때문에 여자는 남자의 고개를 돌릴 수 있다.
해 아래 그리스도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본 적이 없다. 성도보다 아름다운 사람은 없다. 성도는 작은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성도가 도덕군자보다 낫다. 도덕군자는 따분하다. 소크라테스도 성 프란시스에 비교하면 하품 나온다. 소크라테스는 도덕법을 좋아했지만, 성 프란시스는 법 뒤에 계신 분을 사랑했다. 성도는 아름답다. 성도는 모든 아름다움의 원천에까지 뚫고 들어간 사람이기 때문이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야기"인 복음서보다 아름다운 이야기는 없다(톨킨은 "차라리 진실이라고 믿어주는 편이 나은 이야기란 없다"고 말한다). 복음서는 고통과 대못들과 증오와 핏자국과 죄와 살인과 배신과 망각과 상상하기 어려운 비애와 죽음으로 가득 찬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다. 가장 아름다운 것, 완벽한 사랑에 일어난 일에 관한 이야기다. 이것이 우리 세상으로 들어왔을 때, 십자가를 향해 갔을 때, 선과 악의 교차로를 향해 갔을 때 일어난 일에 관한 이야기다. T. S. 엘리엇은 복음을 "무한히 부드럽고, 무한히 고통스러워하는 것에 관한 개념"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복음서와 비슷하다. 이런 이야기들은 일차적으로는 비극이며, 그런 다음에는 희극이다. 십자가와 왕관이다. 그것들은 십자가다. 선과 악 사이의 갈등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모든 위대한 이야기의 근본적인 플롯이다. "참 아름다운 이야기야"하고 말하는 것은, "복음서 이야기를 닮았군"하고 말하는 것이다.
복음서가 따분하다면, 복음서에 금이 가는 게 아니라 당신에게 의심의 눈초리가 돌아간다. 거의 확실하다고 생각하기는, 당신이 복음서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는 뜻이다. 듣기는 들었으되, 경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신의 말을 듣고는 있지만 새겨듣지 않는 친구와 대화를 나누려 할 때의 그 심정 같은 것이다. 음악은 감상(경청)하지만, 소리는 그러지 않는다.
경청했다고 다 믿는 것은 아니다. 당신이 복음서를 맛이 간 전설, 사실이기엔 너무 그럴싸한 신화, 소원 비는 마음의 비정상적인 확장, 혹은 신성모독적인 거짓말이라고 한다면, 나는 당신을 존경하고 논쟁하자고 할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에 찬사를 보낸다면, 당신을 불쌍한 사람으로 볼 것이다. 이 말은 당신이 복음서가 전하는 말을 전혀 경청하지 않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은 우리의 마음을 쪼개는 아름다움이다. 우리의 마음이 먼저 부서지지 않는 한 "욕망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 깊은 진리는 지성을 고치고, 깊은 선량함은 의지를 고친다. 그러나 깊은 아름다움은 마음에 상처를 준다. 아름다움은 할퀸다.
인간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 작품들은 크리스천들의 손에서 나왔다.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예술과 그리스도의 연결은 햇빛과 해의 연결과 같다. 아니 그 아들과 아들에게서 나오는 빛의 연결이다. 세상의 빛이신 그분이 발한 수많은 광점들, 지구의 수면을 거울삼아 비친 하나님의 태양이 바로 예술이다. 귀를 기울이고 들을 때, 온전하여 잠잠할 때, 마음을 다해서 지금껏 한 일 가운데 가장 창의적인 일을 할 때, 입을 다물고 거룩한 침묵으로 들어갈 때, 거기 계시는 그 누군가를 발견한다. 그는 우리를 잔잔한 물가로 이끌고, 우리의 영혼을 회복시키는 분이다. 이 침묵은 허전함과는 다르다. 이 침묵은 꽉 차 있다. 응시하는 사자의 눈에 고인 침묵과도 같다.
중세 고딕 성당들은 이런 침묵을 표현하려고 했다. 그것들은 시대를 훨씬 앞선 기술적인 개가였다. 60년대에 나온 달 착륙 로켓과 비견될 일이다. 아니 그것들은 달 착륙 로켓과 흡사하다. 천사처럼 날 수 있는 육중한 물체 같다. 성당의 치솟은 부벽들은 퍽 로켓의 지느러미처럼 보인다. 노트르담 성당을 봐라. 성당이 지상 착륙대 위에 그렇게 오래도록 얹혀 있는 모습에 놀라고 만다. 이 거대한 구조물이 눈앞에서 갑자기 지상을 박차고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모습을 보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럴 줄 알았어. 언젠간 이렇게 될 줄 알았지." 이 성당들은 "돌로 지은 설교"라고 불려왔다. 그러나 사실은 그 이상이다. 그것들은 돌 안에 든 영이다. 돌 안에 있는 천사들이다. 그리스도는 돌로 빵을 만드는 기적을 행하지 않으실 것이나, 크리스천들은 돌들로 천사를 만드는 기적을 행했다.
이 기적을 대체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이 세상에는 없다. 그래서 기적이다. 그리스도만이 이 성당들에 대해 설명하실 수 있다. 석공들이 그 성당들을 지은 게 아니다. 믿음이 지었다. 그분의 현존이 그것들을 세웠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분의 현존이 경배를 받으셨다. 이 성당들은 예배하는 사람들을 수용하는 집이 아니라, 예배 받으시는 그리스도를 모시는 집으로 세워졌다. 그것들은 그분의 집이었다. 그래서 사람이 지을 수 있는 집보다 훨씬 더 나아야 했다. 그것들은 가능한 것의 위반이며 불가능의 유입이 돼야 했다. 이점에서는 십자가와 같다. 그것들은 십자가의 그늘 안에 세워졌다. 이 성당들은 그리스도, 사람을 향한 미친 사랑 때문에 끝내 십자가를 져야 했던 그분을 미친 듯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세웠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지상에서 관찰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다. 그분이 그 안에서 사시고 사랑하시며 움직이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은 지상에 모습을 드러낸 가장 아름다운 것이었다.
먼저 복음서를 받아들이는 것은 언제나 우리의 마음이다. 아름다움에 목말라 하는 마음이 진리에 목마른 머리를 언제나 이끌고 간다. 우리를 매료시키는 것은 진리의 아름다움 그리고 선의 아름다움이다. 진리와 선의 옳음만은 아닌 것이다. 마음이 이것들을 먼저 알아본다. 녹아내리는 마음에서 나오는 열기가 얼어붙은 지성과 의지를 녹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누구의 얼굴인가, 그는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어떤 사랑이 그를 거기로 몰아갔는가, 그리고 누구의 죄 때문에 그가 거기로 가야 했는가를 알고도 녹아내리지 않고 십자가의 그 얼굴을 볼 수 있는 자들은 오직 강심장들만이다.
세상은 복음서로 인해 돌이켰다. 복음서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미친 사랑의 아름다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이 사랑 이야기로 돌아선 이야기 역시 사랑 이야기다. 이것은 이 미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이야기다. 우리는 이 이야기가 지닌 합리성에 힘입어 돌이킨 것이 아니다. 이 이야기는 합리적이지 않다! 어떤 사람이 관상용 개미집에 사는 반역적인 개미들을 사랑했다. 너무 사랑한 나머지 개미가 됐고 개미들을 그 죄에서 구하기 위해 개미들이 자기를 고문하고 죽이도록 했다. 이 이야기가 훨씬 더 합리적인 것 같다. 우리는 납득하기 힘든 사랑의 부족이라고밖에는 말 할 수 없는 이유로 죄를 지었다. 그리고 그분은 납득하기 힘든 사랑의 과잉이라고밖에는 말 할 수 없는 이유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것은 미쳤다. 아무것도 합리적이지 않다. 아무것도 예측되지 않는다. 아무것도 따분하지 않다. 그래서 모든 게 아름답다.
이런 아름다움에 대해 아름답기는커녕 하품 나는 반응을 할 수 있는가? 그 살아계신 분을 어떻게 미라로, 화석으로 만들 수 있는가? 호랑이 그리스도를 장난감으로 만들어 껴안고 팔고 할 수 있는 영적인 박제술을 어떻게 고안해냈는가? "그분, 참 멋지지 않아요?"하고 맥없이 속닥거리느니 "그 자를 십자가에!"하고 악다구니를 쓰는 게 훨 낫다. 그분은 새끼고양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왕, 호랑이, 사자 그리스도다. 그 사자가 포효하는 소리를 들을 때, 그 따위는 신화, "한여름 밤의 꿈"일 뿐이라 친다 하더라도, "어디, 한 번 더 으르렁거려 보라지"하고 말 할 수는 없다.
경배
인간을 거칠게 사랑하는 이 분에 대한 사람의 또한 거친 사랑이 복음서에서 어떻게 권태를 날려 보내는지 한 번 지켜보라.
예수께서 베다니에서 나병으로 고생하던 환자 시몬의 집에 머무실 때에,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는데, 한 여자가 매우 값진 순수한 나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 그런데 몇몇 사람이 화를 내면서 자기들끼리 말하기를 "어찌하여 향유를 이렇게 허비하는가? 이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서,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었겠다!" 하였다. 그러고는 그 여자를 나무랐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가만두어라. 왜 그를 괴롭히느냐? 그는 내게 아름다운 일을 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늘 너희와 함께 있으니, 언제든지 너희가 하려고만 하면, 그들을 도울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다. 곧 내 몸에 향유를 부어서, 내 장례를 위하여 할 일을 미리 한 셈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온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사람들이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를 넘겨 줄 마음을 품고, 그들을 찾아갔다. (마가복음 14.3-10)
신약성경이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지만, 전통적인 해석으로는 이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라고 한다. 상상해보라. 전직 창녀가 예수에게 존경의 예를 표하고 있다! 상상해보라. 일 년치 급여(이 돈을 어떻게 벌었을지 잊지 말아야 한다!)를 향수 한 병 사는 데 "낭비"했다. 그리고 이 향수를 그분의 먼지 앉은 머리에 단박에 부어버림으로써 "낭비"했다! 가룟유다가 아니더라도 이 모습을 보고 가만히 있을 사람은 없다. 신중하고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만히 있지 못할 것이다. 이 돈이면 가난한 수 십 가정을 구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1500년 후 또 다른 장면 하나를 상상해보라. 고문당한, 그러나 경건하고 천재적인 동성연애자 예술가 한 명이 있었다. 교황이 직접 그에게 위탁한다. 세월이 흘러도 손색이 없는 기독교국가들 최고의 중심 교회당을 설계해 달라는 것이었다. 세계에서 생산된 금의 절반이 이 교회 건축에 쏟아 부어졌다. 세계의 절반이 굶주리고 있는 실정이었다. 알겠는가? 같은 이야기다. 이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가 아니라 유다의 편을 들고 싶은 심정이 굴뚝같이 든다.
유다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 있다. 두 죽음에 그는 책임이 있다. 먼저는 그리스도의 죽음이고 그 다음은 자신의 죽음이다. 그에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두 사람, 현세에서든 혹 영원에서든 그들로부터 빠져나갈 수 없는 유일한 두 사람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 그의 신체적 자살은 영적 자살 직후에 일어났다. 이 사건은 복음서 이야기에서 다뤄진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그는 예수를 배신했는가? 막달라 마리아는 무슨 경우에 없는 짓을 했기에 유다가 저주를 퍼부으며 나섰는가?
답은 한 단어로 경배다. 경배는 권태라는 문제에 대한 결정적이고 영원한 답이다. 경배는 하늘의 비즈니스기 때문이다. 하늘보다 작은 모든 것은 우리를 따분하게 만든다. 우리 마음보다 큰 것은 오직 하늘이기 때문이다. 이유야 무엇이 됐건 간에, 아무리 점잖게 보이더라도 유다처럼 경배를 경멸하면, 그분과 하늘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이다. 미갈이 하나님이 언약궤 앞에서 경배하며 춤추던 다윗에게 한 짓이 이것이다(삼하 6.16).
경배는 무제한의 사랑, 정직한 사랑, 사랑 그 자체의 옹호에 의해서 영원으로 승화된 사랑이다. 경배는 정상이 없는 산, 영원히 하늘을 향해 뻗어나가는 야곱의 사다리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경배를 받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만이 무한한 선, 진리 그리고 아름다움이시고, 따라서 오직 하나님만이 무제한의 사랑이실 자격이 있다. 우리의 "첫째 되고 가장 큰 계명"은 우리의 마음, 영혼, 지성 그리고 힘을 다해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막 12.30) 이 사랑을 다른 피조물에게 돌리면, 심지어 그것이 배우자라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거슬려 간통을 저지른 것이다. 영적인 간통이 바로 우상숭배다. 그렇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우리 자신과 영적인 간통을 범한다. 우리에게는 "네 몸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이 주어졌다. 우리 자신을 경배해서는 분명히 안 되는 것이다. 이웃을 경배해서는 안 되는 이유인 것이다. 우리 자신이건 이웃이건, 우리의 마음 전체로 사랑함으로써 누구도 하나님으로 대우하면 안 된다. 물건에 우리의 모든 마음을 뺏겨서는 분명히 안 된다. 다른 물건과 교환을 위해 있을 뿐인 돈이라는 물건에 우리의 모든 마음을 뺏기는 것은 어리석은 중에서도 어리석은 일이다. 유다는 바로 이런 짓을 했다.
창녀였을 때 막달라 마리아는 자신, 아니 하나님, 아니 그가 유혹한 남자들을 사랑하지 않았다. 돈으로 산 물건을 사랑했다. 자기 몸뚱이만 사랑했다. 그것으로 남자와 그들의 돈과 비싼 향수와 같은 물건을 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는 경멸뿐인 자기애를 경배로 바꿨다. 자신의 모든 영혼과 모든 육신과 모든 삶과 모든 돈과 모든 물건을 그리스도에게 드렸다. 그 향수는 물건이었고 돈이었고 남자들이었고 창녀짓이었고 인생이었고 마음이었다. 모든 것이 공 하나로 뭉쳐졌다. 그는 이 공을, 마치 착한 개처럼 그리스도에게 드렸다. 나쁜 개처럼 물고 있지만 않았다. 이것이 기쁨의 비밀이다. 이 교훈을 우리가 기르는 개들에게서도 배울 수 있다. 그리스도는 개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기쁨을 가르치시나, 우리는 경청하지 않는다.
기획하고 계획하고 매입하고 매도하는 일들은 따분하다. 경제학은 "회색의 학문"이다. 아무리 고결하고 필요한 학문이더라도 그렇다. 그러나 모든 것을 털어버리는 일은 지루하지 않다. 아시시의 부잣집 도련님 프랜시스는 따분한 인생이었다. 그가 그리스도와 사랑에 빠져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청빈의 음유시인이 될 때까지 그랬다. 사도바울은 이 "물건," 그리스도 외에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파격적인 단어로 표현했다. 그는 빌립보서 3장 8-10절에서 그걸 스쿠발라 skubala라고 말했다. 영어에서는 상스러운 말로 치부된다. 강하고 대담하고 솔직한 말이다. 문자주의를 고집한 흠정역 성경 King James Bible의 번역자들 덕분에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게 됐다. "똥."
하지만 이건 비싼 똥이다. 바울의 스쿠발라는 세상 어디에 내다놓아도 구리지 않다. 바울은 세상 지식의 최고봉에 올랐던 사람이다. 로마 시민권자였다. "이스라엘의 빛"으로 알려진 가말리엘 문하에서 교육받았다. 유대인들과 로마인들 그 어느 쪽으로 봐도 지체 높고 세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도덕적으로 엄격한 종교(유대교)에서 가장 도덕적으로 엄격한 당파의 기준에서도 도덕적으로 "성공"한 사람이었다. 그는 "바리새인 중 바리새인이요 율법으로도 흠이 없었다." 그런데 그가 이 모든 것들을 그리스도의 발 앞에 놓고 그것을 스쿠발라라고 하고 있다. 왜 그럴까? 단테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도 베아트리체에 비하면 곰보빵으로 볼 수 있었다. 그렇다. 사랑은 당신에게 눈을 준다.
사랑은 가장 깊은 의미에서 이성적이다. 따라서 정상적인 의미에서는 비이성적이다. "이성"이라는 말의 가장 깊은 속뜻은 이렇게 요약된다. "실제에 대한 바른 반응." 정상적이고, 표피적인 의미에서 "이성"은 "실천적인 신중함"이다. 유한한 것들 사이에서는 쓸 만한 정의지만, 무한은 비정상적인 것을 요구한다. 성도의 미친 사랑은 이성적이다. 무한한 실제에 대한 바른 반응이기 때문이다. 절대자를 절대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이성적이다. 그것은 상대적인 것을 상대적으로 아끼는 것이 이성적인 것과 마찬가지다. 절대자와 무한자를 상대적이고 유한한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은 이성적이지 않다. 마치 유다가 그리스도 앞에서 신중하고 현실적이었던 것과 같다. 이것은 우상숭배적으로 절대적이고 무한한 사랑으로 상대적이고 유한한 것을 사랑하는 일과 다를 바 없다. 어떤 다른 것에 환장하는 것만큼이나 그리스도에 대해서 획 돌아가지 않는 것은 돈 것이다. "'예'이시며 동시에 '아니오'도 되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예'만 있을 뿐입니다." (고후 1.19) 그래서 성도들은 그분을 순수한 예로 사랑한다.
이것이 진정한 종교의 핵심이며 알맹이다. 세상의 기준에서는 미친 것이다. (프로이트는 미친 걸 미쳤다고 할 만큼 정직했다.) 마리아의 미친 경배는 자기 저주의 미침에 이를 만큼 유다를 자극했다. 요한복음은 유다가 다른 두 비슷한 사랑의 미친 행동들을 봤을 때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갔다고 기록한다. 첫째, 그리스도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것이고, 다음은 그리스도가 자신의 몸과 피를 다락방에서 거행한 첫 성만찬에서 제자들에게 나눠준 것이다. (요 13.1-30) 유다는 이 땅에 출현한 가장 지순한 사랑을 보고,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는 이 땅에 임한 하늘나라를 보았고, 그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조급함은 지옥이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다.
또 다른 한 사건에서 같은 병적인 사랑을 확인한다. 또 다른 마리아에 향한 이 병적인 사랑은 마르다에게 "이성적인" 신중함을 약간 불러 일으켰다. 이런 신중함은 이미 유다에게서 본 것이다. 그러나 마르다는 유다와는 달리 나중에 듣고 배운다.
그들이 길을 가는데, 예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마르다라고 하는 여자가 예수를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이 여자에게 마리아라고 하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의 발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다는 여러 가지 접대하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마르다가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나 주께서는 마르다에게 대답하셨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필요한 일은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그는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눅 10.38-42)
마르다의 영혼은 나뉘었다. 예수에게도 가 있었지만 "일"에도 가 있었다. 그래서 마음이 불안했다. 유다의 경우처럼 탐욕은 아니었지만, 근심이 그의 영혼을 질식시켰다. 마르다의 영혼은 "많은 것들"에 가 있었지만, 마리아의 영혼은 오직 예수에게 있었다. 마르다는 "합리적"이었지만, 마리아는 그렇지 않았다. 예수가 오실 때 마리아는 염려하거나 "많은 것들"을 계산하지 않았다. 그는 그분의 아들을 막는 어떤 많은 것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딴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의 사랑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그는 마르다처럼 그분에게 봉사만 바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바쳤다. 그는 정녕 로맨티스트였다. 마리아는 "값진 진주" 하나를 위해 모든 진주들을 판, 모든 재산을 한 투자처에 내걸었다. 그는 영적인 상호신용 기금이라는 안전망을 치지 않았다.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거룩한 거칢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꼭 필요한 한 가지"였다. 그는 "종국에 인생은 성도가 아니었다는 오직 이 하나의 비극인 것이다"(레온 블로이 Leon Bloy의 작품, 가난했던 그 여인의 마지막 글귀)를 알고 있었다. (이 한 문장이 당신이 지금까지 모은 책 전부보다 더 가치가 있다.)
거룩함이 경배의 대상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경배의 대상이라는 말은 옳다. 사실 이것이 거룩함의 정의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제외하고는 성도의 아름다움은, 없어도 아주 없다. 성도는 무한한 위험을 감수한다. "신앙의 도약"이 그것이다. 이 위험은 아름답다. 게다가 권태에 대한 답변도 된다. 하지만 무한한 위험은 무한한 아름다움의 원인이 아니다. 무한한 아름다움(그리스도)가 무한한 위험의 근원이다. 그리스도가 죽은 자라면, 저 도약은 아름답거나, 선하거나, 진실하거나, 혹은 대단하지 않을 것이다. 추하고, 거칠고, 어리석고 그런데다가 따분하기까지 할 것이다. 그리스도가 살아 계시지 않다면, "예수충격"도 헛방에 불과하다. 효과는 원인에 달린 것이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고 우리는 동정 받아 싼 자들이다. (고전 15.17-19)
효과가 원인을 증명한다. "예수충격"은 예수가 살아 있음을 증명한다. 살아있는 전선만이 당신에게 전기충격을 준다. 죽은 전선으로는 안 된다.
전기가 흐르지 않아도, 모든 건 똑같아 보이는 법이다. 똑같은 형태, 똑같은 굵기, 똑같은 색깔의 전선이 있다. 교회들이 여전히 서 있다. 회중석에도 사람들이 차 있다. 그러나 누구도 충격을 받지 않는다.
당신은 충격 먹었는가?
그렇지 않다면, 누구에게로 가야 할지 알 거다.
대체품을 사양하라. "자녀 여러분, 우상을 멀리 하십시오."
3부
복음서가 말하는 예수충격
말을 늘어놓는 것보다는, 예수가 복음서들에서 던진 충격의 여러 장면들을 보여주는 게 낫겠다. 그는 이 충격을 오늘날에도 이어 하고 계시다. 왜냐하면 그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한결같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히 13.8) 여기서부터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펼쳐진다. 나머지 모든 것들의 기초가 되는 데이터가 소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충격"에 관한 복음서들의 모든 말씀이 여기 요약돼 있다. 나는 그것들을 여러 범주로 나눴다. 부드러운 것에서부터 정말 정신을 차리기 힘든 것까지로 올라간다. 학교 숙제라고 생각하지 말고 이 부분을 읽어라. 위험한 원정에 나섰다고 생각하라. 이 원정에서는 맹수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분은 "길들여진 진 사자"가 아니다.
가. 예수의 말과 가르침을 듣고 충격 먹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니, 무리가 그의 가르침에 놀랐다. 예수께서 그들의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마 7.28-29)
안식일이 되어서, 예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서 말하였다.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런 모든 것을 얻었을까? 이 사람에게 있는 지혜는 어떤 것일까? 그가 어떻게 그 손으로 이런 기적들을 일으킬까? 이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닌가? 그는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이 아닌가? 또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와 같이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 (막 6.2-3)
사흘 뒤에야 그들은 성전에서 예수를 찾았는데, 그는 선생들 가운데 앉아서,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의 슬기와 대답에 경탄하였다. (눅 2.46-47)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그 은혜로운 말씀에 놀라서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눅 4.22)
그런데 사람들은 그의 가르치심에 놀랐으니, 그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눅 4.32)
(엠마오로 가던 길에서)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그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이하여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속에서 뜨거워지지 않았던가?" (눅 24.32: 불타는 심장의 복음서)
너희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한 것을, 너희는 이상히 여기지(marvel) 말아라.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는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 니고데모가 예수께 묻기를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니 (요 3.7-9)
성전 경비병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돌아오니, 그들은 "어찌하여 그를 끌어오지 않았느냐?" 하고 경비병들에게 물었다. 경비병들이 대답하였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습니다." (요 7.45-46)
나. 사면초가의 상황을 모면하는 예수의 모습에서 먹는 충격
그들은 말로 예수를 책잡으려고,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 당원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예수께로 보냈다. 그들이 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이 진실한 분이시고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압니다. 선생님은 사람의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예수께서 그들의 속임수를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가, 나에게 보여라." 그들이 그것을 가져 오니, 예수께서 물으셨다. "이 초상은 누구의 것이며, 적힌 글자는 누구의 것이냐?" 그들은 황제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 그들은 예수께 경탄하였다. (막 12.13-17; 비교 마 22.15-22, 눅 20.20-26)
같은 날, 사두개파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예수께 물었다. "선생님, 모세가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에게 장가들어서, 그의 형에게 뒤를 이을 자녀를 세워 주어야 한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이웃에 형제가 일곱 있었습니다. 맏이가 장가들었다가, 자식이 없이 죽으므로, 아내를 그 동생에게 남겨 놓았습니다. 둘째도 셋째도 그렇게 해서, 일곱이 다 그렇게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맨 나중에는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그러니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 일곱 가운데서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였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므로, 잘못 생각하고 있다. 부활할 때에는, 사람들은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두고서는 말하면서, 너희는 아직도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하신 말씀을 읽지 못하였느냐? 하나님께서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다' 하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느냐? 하나님은 죽은 사람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의 하나님이시다." 무리가 이 말씀을 듣고, 예수의 가르침에 놀랐다. (마 22.23-33; 눅 20.27-40 참조)
바리새파 사람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너희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는 누구의 자손이냐?" 그들이 예수께 말하기를 "다윗의 자손입니다" 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면 다윗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그리스도를 주라고 부르면서 말하기를 '주께서 내 주께 말씀하셨다.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된 일이냐? 다윗이 그를 주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그가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 그러자 아무도 예수께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했으며, 그 날부터는 그에게 감히 묻는 사람도 없었다. (마 22.41-46; 비교 눅 20.41-44)
그 뒤에 유대 사람의 명절이 되어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의 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드자다라는 못이 있는데, 거기에는 다섯 개의 행각이 있었다. 이 행각 안에는,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중풍병 환자들 등, 많은 환자들이 누워 있었다. 그들은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때때로 주의 천사가 못에 내려와 물을 휘저어 놓는데 물이 움직일 때에 맨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에 걸렸든지 낫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는 삼십팔 년이 된 병자 한 사람이 있었다. 예수께서 누워 있는 그 사람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랜 세월을 그렇게 보내고 있는 것을 아시고는 "낫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다. 그 환자가 대답하였다. "선생님,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들어서 못에다가 넣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남들이 나보다 먼저 못으로 들어갑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 하시니, 그 사람은 곧 나아서,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갔다. (요 5.1-9)
(이 사건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면에서 딜레마다. 사실은 웃기지만, 가슴 아픈 이야기다. 그 사람은 마비가 있기에 못에 넣어줘야 했다. 그런데 못에 들어갈 수 없었다. 몸에 마비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나의 화두가 아닐 수 없다.
그는 우리다. 이 사람에게 기적적인 몸의 치유가 필요했듯이 우리에게는 기적적인 영혼의 치유가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치유 받을 수 없다. 우리 영혼은 몸만큼이나 마비돼 있다.
예수는 알렉산더가 골디안의 매듭을 끊어버리듯 이 딜레마를 해결한다. 치유 천사의 중개를 거절하고, 이 마비된 사람에게 "예수충격"을 행하신다. (치유천사들은 그분의 천사들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간음을 하다가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워 놓고,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를 돌로 쳐서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이 일을 놓고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예수를 시험하여 보고 고소할 구실을 찾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다. 그들이 다그쳐 물으니, 예수께서 몸을 일으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러고는 다시 몸을 굽혀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나이가 많은 이로부터 시작하여 하나하나 돌아가고, 마침내 예수만 남았으며, 그 여자는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께서 몸을 일으켜,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사람들은 어디에 있느냐? 너를 정죄한 사람이 하나도 없느냐?" 여자가 대답하였다. "주님,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요 8.3-11)
또 하나의 실천적인 딜레마가 튀어나온다. 이번에는 정말 풀 수 없는 화두다. 이들의 질문에 예수가 그렇다고 대답하면, 그 여자를 돌로 치라고 하는 것이고, 그들이 율법적인 것만큼이나 잔인한 사람이 되고 만다. 그리고 예수도 로마법을 위반하는 것이다. 로마는 유대의 종교법에 위반되는 경우라 해도 유대인들에게 사형 집행권을 주지 않았다. 이 질문에 아니라고 대답할 경우, 그 여자를 돌로 치지 말라고 하는 것인데, 그러면 예수는 이단아가 되고 만다. 모세법에 저촉됨으로써 결국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법을 모세에게 주셨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혹은 질문을 피하면, 혹은 땅에 글씨를 쓴다든지 하는 식으로 시간을 끌면, 그는 겁쟁이며 책임회피자요, 결국 패배를 자인하는 셈인 것이다.
하늘에서 번개가 떨어져 내리듯 갑자기 대답이 나왔다. 이 대답은 인간적인 한계를 뛰어넘는 그런 것이었다. 아주 오래 전 하나님의 지혜라는 선물을 받은 사람 솔로몬도 이 비슷한 대답을 했다. (왕상 3.28 참조.)
여기서 예수는 늘 그렇지만 전체 관계를 뒤집어버린다. 사람들은 그를 찍어 누르려고 했지만, 그가 그들을 내리 누른다. 질문하고 있는 그가 누구인지 폭로한다. 그가 질문을 받은 것처럼 보이지만 아니다. 그리고 지금 질문을 받고 있는 자들이 누구인가도 폭로한다. 겉보기에는 그들이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욥에게도 똑같은 일들이 일어났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에게 질문을 던지고 하나님을 두리번거리며 찾는다. 그러나 줄곧 하나님이 그를 시험하고 있으며 그에게 질문을 던지며 그를 찾고 계셨다. 하나님은 답이 아니라 질문을 가지고 나타나셨다.
그분은 "그가"(He is) 아니라 "나는"(I AM)이다. 근원, 주제 그리고 심문자이지, 결과, 대상 그리고 피의자가 아니다. "예수충격"은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나온다.
C. 예수의 치유로 말미암은 충격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서, 마침내 문 앞에조차도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셨다. 그 때 한 중풍병 환자를 네 사람이 데리고 왔다. 무리 때문에 예수께로 데리고 갈 수 없어서, 예수께서 계신 곳 위의 지붕을 걷어 내고, 구멍을 뚫어서, 중풍병 환자가 누워 있는 자리를 달아 내렸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 환자에게 "아들아, 네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 율법학자 몇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이 사람이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할까? 하나님을 모독하는구나. 하나님 한 분 밖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 예수께서,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곧바로 마음으로 알아채시고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마음속에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느냐? 중풍병 환자에게 '네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거두어 가지고 걸어가거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서, 어느 쪽이 더 말하기가 쉬우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겠다." 예수께서 중풍병 환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거두어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그러자 중풍병 환자가 일어나서, 곧바로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리를 거두어 가지고 나갔다. 사람들은 모두 크게 놀라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우리는 이런 일을 전혀 본 적이 없다" 하고 말하였다. (막 2.2-12; 비교 눅 5.18=26, 마 9.2-8)
무리 가운데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있었는데, 의사에게 재산을 모두 다 탕진했지만, 아무도 이 여자를 고쳐 주지 못하였다. 이 여자가 뒤에서 다가와서는 예수의 옷술에 손을 대니, 곧 출혈이 그쳤다. 예수께서는 "내게 손을 댄 사람이 누구냐?" 하고 물으셨다. 사람들이 모두 부인하는데, 베드로가 "선생님, 무리가 선생님을 에워싸서 밀치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누군가가 내게 손을 댔다. 내게서 능력이 빠져 나간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 여자는 숨길 수 없음을 알고서, 떨면서 나아와 예수께 엎드려서, 그에게 손을 댄 이유와 또 곧 낫게 된 경위를 모든 백성 앞에서 이야기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하고 말씀하셨다. (눅 8.43-48; 비교 마 9.20-22)
예수의 옷에 손댐으로써 여자가 받은 것은 무엇인가? 예수충격.
그들이 떠나간 뒤에, 사람들이, 귀신이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하나 예수께 데리고 왔다. 귀신이 쫓겨나자, 말 못하는 사람이 말문을 열었다. 무리가 놀라서 "이런 것은 이스라엘에서 처음 보는 일이다" 하고 말하였다. (마 9.32-33)
D. 자연을 제어하는 예수의 권능 때문에 받은 충격
예수께서 배에 오르시니, 제자들이 그를 따랐다. 그런데 바다에 큰 풍랑이 일어나서, 배가 물결에 막 뒤덮일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다가가서 예수를 깨우며 "주님, 살려 주십시오.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왜들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하고 말씀하시고 나서, 일어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바다가 아주 잔잔해졌다. 사람들은 놀라서 말하였다. "이분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이분에게 복종하는가?" (마 8.23-27; 비교 눅 8.22-25)
바람과 바다를 꾸짖을 때 하신 예수의 말씀은 무엇인가? 아마 애완견에게 하는 말과 똑같은 것이었으리라. "얘야, 앉아라!"
예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에 태워, 자기보다 먼저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그 동안에 무리를 헤쳐 보내셨다. 무리를 헤쳐 보내신 뒤에, 예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올라가셨다. 날이 이미 저물었을 때에, 예수께서는 홀로 거기에 계셨다. 제자들이 탄 배는, 그 사이에 이미 3)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풍랑에 몹시 시달리고 있었다. 바람이 거슬러서 불어왔기 때문이다.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로 가셨다. 제자들이,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서 "유령이다!" 하였다. 그들은 무서워서 소리를 질렀다.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셨다. 베드로가 예수께 대답하여 말하기를 "주님, 주님이시면, 나더러 물 위로 걸어서, 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하십시오" 하니, 예수께서 "오너라" 하셨다.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갔다. 그러나 베드로는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자,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물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 그 때에 그는 "주님, 살려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께서 곧 손을 내밀어서, 그를 붙잡고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 하셨다. 그리고 그들이 함께 배에 오르니, 바람이 그쳤다.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에게 무릎을 꿇어서 경배드리고 "선생님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였다. (마 14.22-32)
마침 길가에 있는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보시고, 그 나무로 가셨으나, 잎사귀 밖에는 아무것도 없으므로, 그 나무에게 "이제부터, 너는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무화과나무가 곧 말라 버렸다. 제자들은 이것을 보고 놀라서 "무화과나무가 어떻게 그렇게 당장 말라 버렸을까?" 하고 말하였다. (마 21.19-20)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깊은 데로 나가거라. 너희는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시몬이 대답하기를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였다. 그런 다음에, 그대로 하니, 많은 고기 떼가 걸려들어서,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자기들을 도와 달라고 하였다. 그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히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시몬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예수의 무릎 앞에 엎드려서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베드로와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은, 자기들이 잡은 고기가 엄청나게 많은 것에 놀랐던 것이다. (눅 5.4-9)
E. 죽음을 제압하는 예수의 권능에 받은 충격
그들이 회당장의 집에 이르렀다. 예수께서 사람들이 울며 통곡하며 떠드는 것을 보시고,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떠들며 울고 있느냐?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셨다. 그들은 예수를 비웃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다 내보내신 뒤에, 아이의 부모와 일행을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달리다굼!" 하고 말씀하셨다.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거라" 하는 말이다.) 그러자 소녀는 곧 일어나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막 5.38-42; 비교 눅 8.51-56)
(사람들은 너무 놀라 아이에게 먹을 걸 줄 수도 없었다! 안 놀란 이는 예수뿐이다.)
조금 뒤에 예수께서 나인이라는 성으로 가시게 되었는데, 제자들과 큰 무리가 예수와 동행하였다. 예수께서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에, 상여가 나오고 있었는데, 죽은 사람은 그의 어머니의 외아들이고, 그 여자는 과부였다. 그런데 그 동네 많은 사람이 그 여자와 함께 상여를 뒤따르고 있었다. 주께서 그 여자를 보시고, 가엾게 여기시며 울지 말라고 하셨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서, 관에 손을 대시니, 메고 가는 사람들이 멈추어 섰다. [여기까지가 예비적인 예수충격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젊은이야,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거라" 하셨다. 그러자 죽은 사람이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 그를 그의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그래서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말하기를 "우리에게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아 주셨다" 하였다. (눅 7.11-16)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나사로 살리신 이야기는 너무 길어(57절이나 된다) 여기 소개할 수 없다. 당신이 직접 찾아 읽어보길 바란다. 그 사건은 놀랍도록 섬세하고, 복선이 많이 깔려 있으며, 뉘앙스가 미묘하며, 아주 구체적이다. 예수충격을 보고 싶거든, 나사로가 걸어 나오는 장면에서 제자들의 얼굴을 확인하길 바란다. 이 장면은 영화 가장 귀한 이야기 The Greatest Story Ever Told에 나온다.
F. 예수의 부활에서 받는 충격
안식일이 지나니,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가서 예수께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그래서 이레의 첫날 새벽, 해가 막 돋을 때에, 무덤으로 갔다. 그들은 "누가 우리를 위하여 그 돌을 무덤 입구에서 굴려내 주겠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그런데 눈을 들어서 보니, 그 돌덩이는 이미 굴려져 있었다. 그 돌은 엄청나게 컸다. 그 여자들은 무덤 안으로 들어가서, 웬 젊은 남자가 흰 옷을 입고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몹시 놀랐다. 그가 여자들에게 말하였다. "놀라지 마십시오. 그대들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나사렛 사람 예수를 찾고 있습니다만, 그는 살아나셨습니다.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그를 안장했던 곳입니다. 그러니 그대들은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십시오. 그는 그들보다 앞서서 갈릴리로 가십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들은 거기에서 그를 볼 것이라고 하십시오." 그들은 뛰쳐나와서, 무덤에서 도망하였다. 그들은 벌벌 떨며 넋을 잃었던 것이다. 그들은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못하였다. (막 16.1-8)
그러나 베드로는 일어나서 무덤으로 달려가, 몸을 굽혀서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모시옷만 놓여 있었다. 그는 일어난 일을 이상히 여기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눅 24.12. 베드로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하고 궁금했던 게 아니라, 일어난 일에 경이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몸소 그들 가운데 들어서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놀라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유령을 보고 있는 줄로 생각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지 않으냐?" 이렇게 말씀하시고, 손과 발을 그들에게 보이셨다. 그들은 너무 기뻐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그에게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니 예수께서 받아서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 (눅 24.36-43)
G. 귀신들을 제압하는 예수의 권능 때문에 받은 충격
그 때에 사람들이, 귀신이 들려서 눈이 멀고 말을 못 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께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 그를 고쳐 주시니, 그가 말을 하고, 보게 되었다. 그래서 무리가 모두 당황하여 "이 사람은 다윗의 자손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마 12.22-23)
그 때에 사람들이, 귀신이 들려서 눈이 멀고 말을 못 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께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 그를 고쳐 주시니, 그가 말을 하고, 보게 되었다. 그래서 무리가 모두 당황하여 "이 사람은 다윗의 자손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그 때에 회당에 악한 귀신 들린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큰소리로 이렇게 말하였다. "나사렛 사람 예수님, 왜 우리를 간섭하려 하십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입니다." 예수께서 그를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입을 다물고 이 사람에게서 나가거라" 하셨다. 그러자 악한 귀신은 그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서 큰 소리를 지르며 떠나갔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이게 어찌된 일이냐?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다! 그가 악한 귀신들에게 명하시니, 그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면서 서로 물었다. 그리하여 예수의 소문이 곧 갈릴리 주위의 온 지역에 두루 퍼졌다. (막 1.23-28; 비교 눅 4.33-37)
예수가 귀신 들린 거라사 사람에게서 귀신을 내어 쫓으셨다. (그 사람의 이름은 "군대"였다. 눅 8.30)
그러자 거라사 주위의 고을 주민은 모두 예수께 자기들에게서 떠나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들이 크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눅 8.37; 비교 마 8.34)
H. 적개심의 대상이 된 예수 때문에 받는 충격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서는, 어떻게 예수를 없애 버릴까 하고 방도를 찾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를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리가 다 예수의 가르침에 놀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막 11.18)
예수가 손 마른 사람을 안식일에 고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화가 잔뜩 나서,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였다. (눅 6.11)
I. 우리의 적은 믿음 때문에 받는 충격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막 6.6)
너희가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 그 안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나를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생명을 얻으러 나에게 오려고 하지 않는다. (요 5.39-40)
얼마나 모순인가! 줄리엣이 로미오의 방문을 두드린다. 그러나 로미오는 방문을 열려 하지 않는다. 그는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다. 그가 보고 있는 책은 줄리엣의 사진첩이다!
J. 그의 신성 때문에 받은 충격
그런데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모습이 변하였다. 그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되었다........갑자기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뒤덮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자들은 이 말을 듣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몹시 두려워하였다. (마 17.2, 5, 6)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을 받았을 때에, 아기가 그의 뱃속에서 뛰놀았다.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충만해서, 큰소리로 외쳐 말하였다. "그대는 여자들 가운데서 복을 받고, 그대의 태속에 있는 열매도 복을 받았습니다. (눅 1.41-42: 예수가 가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을 때, 물은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얼굴이 붉어졌노라 노래한 시인이 있다. 여기서는 아기 선지자가 그의 하나님을 뵙고 겅중겅중 뛴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내가 너를 보았다고 해서 믿느냐? 이것보다 더 큰 일을 네가 볼 것이다." 예수께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11)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요 1.50-51)
대제사장들과 경비병들이 예수를 보고서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하고 외쳤다. 그러자 빌라도는 그들에게 "당신들이 이 사람을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소" 하고 말하였다. 유대 사람들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우리에게는 율법이 있습니다. 그 율법을 따르면, 그는 마땅히 죽어야 합니다. 그가 자기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서, 다시 공관 안으로 들어가서 "네가 어디서 왔느냐?" 하고 예수께 물었다. (요 19.6-9)
두 종류의 예수충격이 있다. 악하고 정직하지 않은 자들에게 예수충격은 공포심을 준다. 그러나 선량한 자들에게는 경이로움과 기쁨을 가져다준다. 빌라도와 아래 이야기를 대조해보라.
그런데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울다가 몸을 굽혀서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흰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의 시신이 놓여 있던 자리 머리맡에 있었고, 또 한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여인아, 왜 우느냐?" 마리아가 대답하였다. "누가 우리 주님을 가져 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뒤로 돌아섰을 때에, 마리아는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지만, 그분이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였다.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아,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여보세요, 당신이 그분을 옮겨 갔거든, 어디에다 두셨는지를 말해 주십시오. 내가 그분을 모시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가 돌아서서, 1)히브리 말로 "라부니!" 하고 불렀다. (그것은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요 20. 11-16)
그런 다음에,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래서 의심을 떨치고 믿음을 가져라" 하고 말씀하셨다. 도마가 예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하고 대답하니. (요 20.27-28)
K. 그를 보았을 때 받은 다른 충격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서는 몹시 놀라, 달려와서 인사하였다. (막 9.15)
대제사장들은 여러 가지로 예수를 고발하였다. 빌라도는 다시 예수께 물어 말하였다. "당신은 아무 답변도 하지 않소? 사람들이 얼마나 여러 가지로 당신을 고발하는지 보시오." 그러나 예수께서는 더 이상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빌라도는 이상하게 여겼다. (막 15.3-5)
예수의 부모는 해마다 유월절에는 예루살렘에 갔다. 예수가 열두 살이 되는 해에도 그들은 절기관습을 따라 유월절을 지키러 올라갔다. 그런데 그들이 절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에, 소년 예수는 예루살렘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는데, 그의 부모는 이것을 모르고, 일행 가운데 있으려니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다음에, 비로소 그들의 친척들과 친지들 가운데서 그를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그들은 그를 찾으려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다. 사흘 뒤에야 그들은 성전에서 예수를 찾았는데, 그는 선생들 가운데 앉아서,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의 슬기와 대답에 경탄하였다. 그의 부모는 예수를 보고 놀랐다. 어머니가 예수에게 "얘야, 이게 무슨 일이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찾느라고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모른다" 하고 말하였다. (눅 2.41-48)
I. 그의 "나는" (I AM) 선언에서 받은 충격
지금부터 다루려는 충격의 깊이는 쉽게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떤 유대인이라도 하나님 자신의 자기 계시적인 이름을 입 밖에 내는 꿈도 꾸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름은 거룩한 히브리어 네 글자 JHWH("나는 나다")다. 이 이름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불타는 가시떨기 가운데서 그분의 영원한 이름으로 계시하신 것이다. 이 이름은 감히 인간이 입 밖에 낼 수 없다. 다른 모든 말과는 달리 "나는 나다"는 이인칭 혹은 삼인칭으로는 말할 수 없고 오직 일인칭으로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서 이 말을 입 밖에 낸다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것도 명시적으로, 단호하게, 그리고 대결하는 양상으로 선언하는 것이다. 이것은 변명할 수 없는 신성모독의 이단이다. 하나님 자신이 이 이름을 말씀하지 않은 다음에는 그렇다.
아래 구절들에서 이 이름을 사용한 예에서 최소한 한 번, 예수는 이 단어를 분명히 사용한다. 왜냐하면 이 이름 뒤에 그 어떤 서술어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경우들에서는, 상황, 반응, 그리고 충격이 그가 이 이름을 입에 올렸음을 강력하게 나타낸다.
어떤 경우들에서, 좋은 예로 다니엘의 예언에 나오는 인물인 "인자"처럼 메시아("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인물." "그리스도"의 문자적인 의미)라는 안개에 쌓인 인물이 예언자들의 글에서 살아 걸어 나올 때(요 4, 요 5.28-40), 충격을 받는다. 그런가 하면, 추상적인 어떤 것(예를 들어, "길," "진리," "생명")이 갑자기 구체적인 것이 될 때, 비인격적인 어떤 것(예를 들어, "빵," "문")이 인격적인 것이 될 때, 혹은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 무엇이 그 자신이 될 때 충격이 밀려온다. 생각해보라. 하나님은 어떤 속성들을 가지고 계시거나, 나누거나, 혹은 받거나, 혹은 거기에 참여하지 않는다. 그분이 곧 그분 자신의 속성이다. 그분은 선량함이나 진실이나 아름다움을 소유하지 않는다. 그분이 선함, 그리고 진리 그리고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심지어 어떤 존재를 띠지 않는다. 그가 존재다. 다음 구절들에 나오는 모든 "나는 나다"를 주의 깊게 보라.
여자가 말하기를 "나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압니다. 그가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실 것입니다" 하니 예수께서 "너에게 말하고 있는 내가 그다" 하고 말씀하셨다. (요 4.25-26: 예수와 우물가 여자의 만남을 다룬 길고 세밀한 이야기의 핵심부다. 4장 전체를 이 관점에서 읽어보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부터 너희에게 빵을 내려 주신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부터 참된 빵을 너희에게 내려 주시는 분은 나의 아버지시다. 하나님의 빵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인데, 그것은 세상에 생명을 준다." 그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그 빵을 늘 우리에게 주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내게로 오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요, 나를 믿는 사람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의 조상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다. 그러나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빵은 이러하니, 누구든지 그것을 먹으면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나의 살이다. 그것은 세상에 생명을 준다."
그러자 유대 사람들은 서로 논란을 하며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에게 자기 살을 먹으라고 줄 수 있을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또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 속에는 생명이 없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있을 것이요,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요 6.32-35; 48-57)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요 8.12)
그래서 나는, 너희가 너희의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내가 그이라는 것을 너희가 믿지 않으면, 너희는 너희의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께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지 않았느냐? 또는 '도대체 왜 내가 너희에게 말해야 하느냐?' (요 8.24-25)
유다는 로마 군인 한 떼와, 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보낸 성전 경비병들을 데리고 그리로 갔다. 그들은 등불과 횃불과 무기를 들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자기에게 닥쳐올 일을 모두 아시고, 앞으로 나서서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 하고 그들에게 물으셨다. 그들이 "나사렛 사람 예수요" 하고 대답하니, 예수께서 "내가 그 사람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를 넘겨 준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서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 사람이다" 하고 말씀하시니, 그들은 뒤로 물러나서 땅에 쓰러졌다. (요 18.3-6)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게 될 것을 즐거워하였고, 마침내 보고서 기뻐하였다." 유대 사람들이 말하였다. "당신은 아직 나이가 쉰도 안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단 말이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내가 있었다." 그 때에 그들은 돌을 들어서 예수를 치려고 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몸을 피해서, 성전 바깥으로 나가셨다. (요 8.56-59)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이 때에 유대 사람들이 다시 돌을 들어서 예수를 치려고 하였다. (요 10.30-31)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만나서 "네가 인자를 믿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는 대답하였다. "선생님, 그분이 어느 분입니까? 내가 그분을 믿겠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이다." 그는 "주님, 내가 믿습니다" 하고 말하고서, 예수께 엎드려서 경배하였다. (요 9.35-38)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이 드나드는 문이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이 문으로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들어오고 나가면서 꼴을 얻을 것이다. 나는 선한 목자다. (요 10.7, 9, 14: 비교 겔 34장의 메시야 예언.)
그런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세상에 보내신 사람이,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말을 가지고........ (요 10.36)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네 오라버니가 살아날 것이다." 마르다가 말하였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그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내가 압니다."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마르다가 예수께 말하였다. "예, 주님! 주님은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을, 내가 믿습니다. (요 11.23-27)
유의 깊게 보라. 그분은 단지 사람을 부활시킨 게 아니다. 그분이 부활이다. 그는 나사로의 몸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켜 과거에서 현재로 되돌려 놓으시기 전에, "마지막 날 부활 때"에 가 있는 마르다의 믿음을 현재로 이끌어 오는 일을 하셨다.
도마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우리는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다. (요 14.5-6)
잔소리: 그는 길을 가리키지 않는다. 진리를 설파하지 않는다. 생명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그가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다. 빌라도는 회의에 차서 빈정거리듯 "진리가 무엇이냐?"하고 물었다. 이것은 그의 얼굴 바로 앞에 서 있는 진리를 향한 질문이었다. 이 두 마디 말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하나님은 이것에 가장 심오한 답을 한 말씀(예수)으로 내놓으셨다.
4부: 기반
예수의 현존
신약성경에서 "예수충격"이 파괴적이고 혁명적인 효과를 내는 모습을 살펴봤다. 이제는 그 원인을 살필 차례다.
원인은 예수 자신 외에는 결코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그가 사용한 기법, 그가 표출한 "놀라운" 인성의 특징, 그가 말한 언어의 내용이 아니다. 기법, 인성의 특징, 혹은 언어의 내용은 다른 이들이 복제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도, 그 아무것도 예수를 복제할 수는 없다. 여태껏도 그럴 수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수 없다. 예수 외에는 "예수충격"의 원인이 될 수 없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 부처 자신이 이런 말을 되풀이 했다. "너 자신에게 등불이 돼라." 달리 말해서, "네가 세상의 빛이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따라서 오직 예수만이 예수일 수 있다.
부처는 말했다. "나를 보지 말라. 내 다르마[설법]를 보라." 예수는 말했다. "내게 오라."
예수의 존재만이 아니다. 예수의 존재는 언제나 계셨기 때문이다. 예수는 언제나 존재하셨다. 그는 영원하시다. 예수의 권능 혹은 예수의 사랑 혹은 예수의 지혜만이 아니다. 그것들은 태초부터 예수가 계시는 한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다. "예수충격"을 만들어내는 것은 예수의 현존이다.
"임재"란 무엇인가? "임재"란 알기(kennen, connaitre)에는 쉬워도, 막상 파고들어가 이해하려면(wissen, savoir) 참 어려운 말이다. 힐긋 알기는 쉽다.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 어린아이들, 심한 정신 지체를 지닌 사람들, 심지어는 동물들은 교육받고, 똑똑한 사람들보다 훨씬 더 잘 이 말뜻을 간파하는 수가 많다. 왜냐하면 단순한 사람들은 뭘 감추지 않기 때문이다. 인식하기는 아주 쉽기는 해도, 규정하려면 아주 어렵다.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시도는 해보자. 인간은 순전히 영적존재도 순전히 동물도 아니고, 이 둘이 함께 있는 존재이기에, 인간의 임재는 영적이든지 물리적이든지 혹은 이 둘 모두이든지다.
내가 실수로 당신과 부딪쳐서 당신을 길에 넘어지게 했다. 그런데 당신을 쳐다보지도 않고 진심으로 사과를 한다. "죄송합니다." 이것은 진정한 임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임재- 한 인격이 진정으로 거기 있음-는 물리적인 임장 臨場은 아닌 것이다.
반대 경우다. 내가 당신을 각별히 생각한다. 아니 사랑한다. 내 의지와 정서를 다해서 사랑한다. 그런데 당신은 내게서 수 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이것도 진정한 임재는 아니다. 당신은 부재하다. 물론 때로는 "부재가 좋아하는 마음을 더 키우기"도 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임재는 정신적인 임재만이 아니다. 지성과 의지와 정서에의 임재는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물리적 임재와 정신적인 임재의 조합이 진정한 임재도 아니다. 당신이 수 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데도 당신을 생각하고 사랑하며, 거리에서 당신을 밀치게 돼 넘어지게 만들고 미안하다고 사과를 한다고 해도 그 사람이 당신인 것을 알지 못하면, 이것도 진정한 임재는 역시 아니다. 그것이 아무리 물리적인 임재며 정신적인 임재여도 다를 것 없다. 진정한 임재는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임재를 포함하는 것이고, 나아가서는 더 한 어떤 것이기도 하다.
그 "더 한 어떤 것"을 규정하기란 어렵다. 이유는 그것이 본질이 아니라 실존이기 때문이다. "임재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답을 내놓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임재는 전혀 "무엇"이 아니라, "무엇"의 "거기 있음" 혹은 "여기 있음"이기 때문이다. 보여줄 수는 있으되 규정할 수는 없다.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는 있지만 에둘러 말할 수는 없다. 임재는 마치 불과 같다.
욥의 세 친구들을 기억하라.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말했다. 그들의 말은 신학적으로 정확했다. 마치 그가 거기 안 계시듯 했다. 반면 욥은 하나님을 향해 말했다. 그가 거기 계신 것처럼 말했다. 그분에 대한 그의 개념은 혼란스럽고 빈틈이 많았다. 욥은 보상을 받았다. 하나님이 욥 앞에 나타나셨다. 그러나 세 친구들에게는 나타나지 않으셨다(42.5). 하나님은 그 셋이 그분에 대해 "바르게 말하지" 않았다고 하셨다. 바르게 말한 사람은 욥이었다(42.7). 왜? 욥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고 행동했다. 그가 기도한 것이 이를 입증한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했지만, 그만이 거기 계신 하나님을 향해 말했다. 세 친구들은 이신론 理神論자들이었다. 대부분의 유신론자들은 이론상으로는 아닐지 몰라도 실제로는 거의 늘 이신론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재를 말하고 행동한다.
우리는 위에서 행한 생각의 실험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 대한 한 인격의 진정한 임재는 단지 객관적이고 물리적이지 않고, 또한 주관적이고 정신적인, 혹은 심리적인 것 이상이다, 아니 이 둘 모두를 합친 것 이상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규정하기는 불가능할지 몰라도(객관적인 것 그리고 주관적인 것 외에 다른 무엇이 있는가?), 절대로 그냥 지나쳐버릴 수는 없다.
그리스도의 인격적인 임재는 개신교 복음주의자들(물론 그들만은 아니다)이 아주 잘 안다. 이것은 소위 그들의 "전문영역"이고, 하나님이 이 점으로 인해 많은 복을 그들에게 주셨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인격적인 주님과 구세주로 영접한다." (그들은 굳어진 공식을 의심한다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들도 사람이다.) 그들이 즐겨 말하는 이 공식에서, "인격적"이라는 말은 "주관적인" 혹은 "순전히 개인적인"이라는 뜻이 아니다. 내가 검은 산딸기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것은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것이다. 이 말은 "그분을 인정하고 그분을 믿는 인간에게 한 신적인 인격이 개인적으로 임재 하여 계심"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이 임재가 가장 완벽하게 나타나는 곳은 어디인가? 복음주의자들이 믿고 의뢰하고 경배하는 그리스도가 "몸과 피, 그리고 영과 신성"으로 가장 완벽하게 현재 하여 계신 곳은 어디란 말인가? 그분은 복음주의자들이 기도할 때 항상 똑같이 그리고 완전하게 임재 하시는가? 성경을 읽을 때인가? 그분의 이름으로 자선을 베풀 때인가? 아니다. 물론 그분은 진실로 거기에 계시지만, 그 임재는 달라질 수 있다. 왜냐하면 부분적으로 신자의 영혼에 임재가 좌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거리를 거니신 예수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와 같은 분이다. 그러나 복음주의자에게 나타나시는 예수는 실제로, 전적으로, 객관적으로, 존재론적으로, 혹은 완벽하게 똑같은 방법으로 임재 하지 않으신다. 가톨릭 신학용어를 써서 말하면, 기도와 성경과 선한 사업은 성사 聖事지 성례 聖禮는 아닌 것이다.
그분이 언제나 완벽하게 임재하시는 유일한 한 곳이 있다. 세계의 모든 크리스천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개신교 종교개혁 이후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성만찬이 바로 그곳이다.
크리스천들은 그리스도를 예배한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기에 그렇다. 가톨릭교도들은 영성체를 예배한다. 영성체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그야말로 빵과 포도주의 모습으로 충분히 그리고 진정으로 그리고 실제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그리고 존재론적으로 그분을 경모하는, 그리고 그분을 성만찬에서 받는 가톨릭교도들에게 나타나신다. 그분이 삼년 동안 팔레스타인에 사는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던 것과 다를 바 없다. 아니, 제자들은 마지막 만찬에 이러서야 그분의 몸을 먹고 그분의 피를 마셔, 그분을 밖이 아닌 그들 안에 모시는 특권을 얻었다.
아마도 모든 가톨릭 교리들 중에서 가장 논란을 일으키는 교리 하나를 꼽으라면 바로 이것일 터다. 이 교리는 종교개혁 당시 격심한 논쟁과 열띰과 분노와 전쟁을 일으켰다. 1차 자료들에 나오는 종교개혁의 전쟁사를 읽어보라. 쉽게 이 교리를 발견할 것이다.
곰곰이 생각을 해보면, 그럴 법도 했다. 만약 개신교도들이 옳다면, 가톨릭교도들은 역사상 가장 우스꽝스러운 이단이요 우상숭배자들이 된다. 빵과 포도주를 경배하니 왜 안 그렇겠는가. 신성한 나무나 돌을 섬기는 이방종교와 뭐가 다르단 말인가. 우리는 이런 일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것을 알고 있다. 구약성경만 읽어봐도 안다. 첫 번째 그리고 가장 큰 계명인 우상숭배 금지 계명을 어기는 짓이다. 잘못된 신을 섬기는 것이다.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을 섬기는 것이다. 이것은 기술적인, 비밀스러운, 아주 깊은, 특수한, 이례적인 신학적인 실수가 아니다. 저지를 수 있는 영적으로 가장 어리석인 실수다. 그리고 가톨릭교도들은 이런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매주 일요일 미사를 드리니까 말이다. 개신교도들이 옳다면. 이 교리에 비하면, 교회 권위 혹은 마리아 혹은 성인 혹은 연옥, 혹은 성경 해석 혹은 세례 혹은 예정 등등 개신교도들과 가톨릭교도들 사이의 논쟁은 거의 무시해도 좋을 정도다.
반면 가톨릭교도들이 옳다면, 개신교도들은 가장 완벽하고, 친근하고 그러면서도 완전한 주님과의 연합, 이 세상에서도 가능한 연합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유명한 그림이 있다. 그리스도가 문을 두드리시는데도 그럴 리 없다며 문을 열지 않는 그림이다. 이들은 1세기의 유대인들 같다. 그들은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그들 앞에 나타나셨을 때 그분을 거절했다. 하나님이 다른 모습으로 오실 수 있다는 점을 믿길 거부한 것이다.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인간의 모습으로 볼 믿음이 없었다. 그들은 물리적인 외양에 걸려 넘어졌다. 물리적인 것, 피조물인 것을 우상으로 섬기는 자들은 가톨릭교도들이 아니라 그들이다.
이 문제는 타협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다른 현안들은 훨씬 더 타협가능하다. 이신칭의는 이미 타협이 이뤄졌다. 복음주의자들이 개신교의 필수불가결의 요소요 정수로 보는 솔라 피데(sola fides, 오직 믿음만으로!) 교리, 루터가 로마와 결별을 정당화하는 이유로 내세운 교리, "내가 무엇을 해야 구원받을 수 있는가?"를 묻기에 무한히 중요하다고 여겨졌던 이 교리는 풀렸고 극복됐다! 뉴스가 아직 개신교든 가톨릭이든 일반적인 크리스천들에게까지 전달되지 않았지만, 바티칸과 많은 공식적인 개신교단들, 특별히 루터교회가 합의한 이신칭의에 관한 합동선언문을 보면, 이 기적이 정말로 일어난 것을 알 수 있다. 수 백 년 간 서로를 극악하게 저주하고 몸을 전장과 무덤으로 휘몰아 넣은 후에, 개신교도들과 가톨릭교도들은 자신들이 본질적으로 같은 것을 다른 언어로 말하고, 실체가 아니라 말을 가지고 싸웠음을 결론 내렸다. (물론 지나치게 단순화한 느낌이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바보 같은 짓은 아니다.)
그리고 "솔라 그라티아"(sola gratia, 오직 은혜만으로!)라는 문제는 트렌트 공의회 the Council of Trent 에서 이미 해결됐다. 이 공의회는 개혁자들만큼이나 은혜의 전적인 우위성과 우선성을 확인했다. 공의회는 단지, 은혜가 우리와 우리의 자유의지와 선행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돌려놓는다는 요점을 더했을 뿐이다.
세 번째 "솔라"인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오직 성경만으로!)는 언젠가 풀릴 것이다. 아직은 그 지점에 이르지 못했다. 양 진영이 어설픈 절충안 말고 합의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불과 반세기 전에는 양 진영이 이신칭의에 대해 어설픈 미봉책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합의할 수 있다고 예측한다는 것은 똑같이 불가능한 일로 보였다. (한 사람 예외가 있다. 폰 발타사르이다. 50년대 초반에 나온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루터와 이신칭의를 다루고 있다.) 이 찌르는 점이 해결되면, 이 교리 역시 어느 날엔가 해결될 것이다.
그러면 세 가지 타협 불가의 "솔라"는 모두 해결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현존 문제는 여전히 걸림돌로 남아 있다.
역사를 보라. (내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단 하나의, 불을 보듯 명쾌한 이유는 바로 역사다.) 세상의 어떤 크리스천도 천 년 동안은 성만찬에 실제로 임하시는 그리스도를 의심하거나 부인하지 않았다. 11세기의 이단아 투의 베렌가 Berengar of Tours가 기록을 깼지만, 16세기에 이를 때까지는 이단 발덴시안 파 Waldensians와 알비겐시아 Albigensians파 외에는 그런 자들이 없었다. 알비겐시안 파는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혐오스럽고 무서운 이단으로 손꼽힌다. 이들은 전염병, 박해, 사산, 혹은 회개에 의해서 박멸됐다. 종교개혁이 일어날 때까지 모든 기독교 예배의 중심은, 개신교도들에게 그렇듯 설교가 아니라 언제나 성만찬이었다. 성만찬은, 개신교도들이 으레 그렇게 하는 것과 달리, 결코 건너뛰는 법이 없었다. 종교개혁 전 시대의 크리스천들은 성만찬 없는 예배를 섹스 없는 결혼 비슷하게 여겼다.
이제 최고의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성만찬이 제공하는 것은 무엇인가? 개신교 복음주의자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그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현존과 우리와 그리스도의 진정한 연합, 가장 실제적으로, 전적으로, 완전하게, 개인적으로, 구체적으로 그리고 친근하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인격적인 주님과 구세주로 영접함"이다!
"개신교적 관점"(인격적인 주님이요 구세주이신 그리스도)과 "가톨릭적 관점"(성만찬에 임하시는 그리스도의 현존)의 연결은 굳이 연결시키지 않아도 될 만큼 이미 밀접하다. 아니 실제적으로는 하나다. 이것이 교회 일치운동과 재결합의 중심 열쇠가 돼야 한다. 개신교의 부싯돌과 가톨릭의 쇠가 맞부딪치게 하라. 그러면 세계를 태울 수 있는 불을 붙일 것이다.
그리스도를 당신의 주님으로 영접하는 일을 정당화하고 싶은 개신교도인가? 그렇다면 가톨릭교도들이 하는 것처럼 성만찬에 임하시는 그분을 경배하는 법을 배워라. 그분은 거기 계시다. 성만찬에 임하시는 그분의 현존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가톨릭교도인가? 그러면 개신교도들이 하는 것처럼 그분을 당신의 개인적인 주님과 구세주로 사랑하고 의지하는 법을 배워라. 그분은 정말 개인의 주님이요 구세주시다.
영성체는 "개신교적 관점"과 반대되지 않는다. "개신교적 관점"에 보완도 더더욱 아니다. 그것 자체가 "개신교적인 관점"이다. 영성체는 주 예수 그리스도, 구세주, 구원자로서 일해주시는 당신의 구세주, 그분 자신, 그분의 전 존재, 몸과 피, 영과 신성을 당신에게 다 내어주심으로써 당신을 구원하는 구세주시다. (이 중 어떤 하나만 빠져도 당신은 구원받을 수 없었다.) 영성체는 그분이 당신 안으로 구원을, 즉 그분 자신을 집어넣으시기 위해 굳게 결심하고 세우신 방법이다.
그리스도의 현존과 우리가 복음서들에서 본 "예수충격"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 역시, 2천 년 전 팔레스타인에 살던 사람들이 받았던 동일한 "예수충격," 동일한 혁명적 결과를 받을 수 있다. 그 첫 놀람의 정신적, 정서적 요인들은 더 이상 유효하지가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그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깊은, 더 오래 가는, 혁명적인,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효과는 오늘날도 똑같다. 왜냐하면 그분은 오늘날도 똑같이 실존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사도들에게 그랬듯이, 우리에게 새로운 분이 아닐 수도 있다. 그분은 동일하시다("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한 분이십니다. 히 13.8). 그래서 그분은 우리에게 새로우실 수도 있다. 그분은 "오랜 그러나 항상 새로운 아름다움"이시다.
그분이 여기 계시다! 그분은 옛날에 한 번 부활하신 게 아니라, 지금 부활해계시다. 1세기의 그리스도와 21세기의 그리스도가 존재론적으로 완전히 동일인물이라는 점은, 첫 번째 놀람과 21세기의 친숙함 사이의 정신적이고 정서적인 차이를 싹쓸이해버린다.
그리고 그 정신적이고 정서적인 쇼크는 우리가 집중하는 매순간 되돌아온다. (집중은 매우 희귀하고 매우 값진 덕목이다. 하늘나라에서 우리는 잘 집중하게 될 것이다.) 이분이 누구신지, 무엇을 하시는지, 그리고 왜 그 일을 하시는지를 잊지 않고 기억한다면, 충격은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The Passion of Christ를 볼 때 그랬던 것처럼 계속 올 것이다.
개신교도들은 가톨릭교도들과 똑같이 성도가 되고자 한다. 가톨릭교도가 되는 여러 좋은 이유들 가운데 하나가 이것이다. 성도가 되는 두 가지 가장 완벽하고 강력한 수단은 성체 경배요 잦은 성만찬이다. 이것들이 예배의식상 옳아서도 아니고 심리학적으로 유용해서도 아니다. 죄인을 성도로 만드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 다른 어떤 곳이 아니라 바로 성만찬에 임재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은 계시는 그 어디서나, 가만히 계시지 않는다. 성막에서 인내로 기다리실 때조차, 작은 빵조각의 모양으로 변모하신 순간에조차, 그분은 활달하게 움직이신다. ("기다림" 역시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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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칼빈대학에 다니던 젊은 개신교도였다. 내가 바른 교회에 다니고 있다, 그리스도는 원래 "개신교" 스타일의 교회를 세우셨는데, 이 교회가 점차 가톨릭이 됐다, 그리고 개신교 개혁자들은 사도들의 종교를 떠나서 새로운 교회를 시작한 것이 아니라, 마치 배 밑창에 붙은 조개껍데기들을 벗겨내는 선원처럼, 중세적이고, 비성경적이고, 이교적이고, 이단적인 첨가물들을 빼냄으로써 낡은 교회를 회복했다고 스스로 믿기 위해 초기교회 교부들의 글을 읽었다. 그래서 나는 가톨릭교도들이 믿지만 개신교도들이 믿지 않는 것들, 특별히 교황제, 성인들에게 바치는 기도, 마리아 흠숭, 연옥, 사제 제도, 미사 그리고 영성체 등에 초점을 맞췄다. (이 마지막 세 가지는 동일한 신비의 세 측면이다.)
나는 알게 됐다. 이 교리들 모두가 초기부터 교회에 있었다. 이 중 일부는 완만한 발전과정을 거친다. 예를 들면 마리아 흠숭의 신학, 그리고 로마 주교의 권위를 어느 정도는 노골적으로 또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 일 따위다. 교회 교부들이 소위 "가톨릭적인" 관점에 대해 침묵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지만, 명시적인 반대 혹은 개신교적인 접근은 결코 발견하지 못했다. 초기 기독교 저작자들의 단 한 작품에서도 현재 가톨릭 교리들의 어느 하나에 대해서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개신교적인 반대를 하고 있는 대목을 단 한 군데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첫 천 년간은, 개신교도들이 변종이라고 주장하는 구체적인 가톨릭 교리들에 대해서 그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면 천 년 간 성령님께서 졸고 계셨단 말인가?
그리고 나는 또 알게 됐다. 세 가지 교리는 가톨릭에게도 그렇지만 개신교도들에게도 핵심적이었다. 그것은 삼위일체, 성육신(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두 본성), 그리고 신약의 정경성이다. 이 교리들은 꼬집어 말해서 가톨릭적인 교리들이 그랬던 것처럼, 서서히 "발전해나왔다"(이 교리들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발전됐다는 것이다. 이것들을 싸고 있던 보자기가 "풀어졌다"). 이 교리들은 천둥번개가 아니라 파도처럼 조금씩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개신교도였던 내가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아주 초기부터 기독교 예배에 성체 성사가 중심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체 성사에 그리스도가 현존하심을 보편적으로, 누구도 의심하지 않고 믿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루터도 현존을 부인하지 않았다. 오늘날 루터교 교인들도 부인하지 않는다. 성공회교인들도 안 그렇다. 아니 칼뱅조차 성체 성사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객체적으로 효험이 있는 "증표요 보증" sign and seal이라고 믿었다. 츠빙글리에 이르기 전까지는 어떤 정통적인, 전통적인, 이단과 타협 않는, 주류의, 역사적인, 사도성을 믿는 크리스천도 오늘날 대부분의 개신교도들이 성례에 대해 믿는 것을 믿지 않았다. 오늘날 대부분의 개신교도들은 성례전이 그리스도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거룩한 상징일 뿐이라고 하지 않는가.
레린의 빈센트 Vincent of Lerins가 남긴 오래 된 구절이 이 교리를 확실하게 뒷받침한다. "모두가, 언제나, 모든 곳에서 믿는 교리." 논리적으로도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 내가 삼위일체와 성육신과 성경의 정경성을 믿도록 이끌어준 바로 그 가르침의 권위가, 현존을 확신시켜줬다. 이 모든 교리들은 정확하게 같은 기반 위에 서 있다. 그 기반의 이름, 그 권위의 이름은 "한 거룩한, 보편적인 그리고 사도적인 교회"다. 1500년 동안 모든 크리스천들은 이 교회를 믿었다. 교회 한 군데가 아니라 교회 전체다. 그리스도는 중혼주의자가 아니시다.
개신교도들은 내가 이 모든 근본적인 기독교 교리들을 성경에서 배웠는지 따지고 들 것이다. 그렇다. 하지만 교회가 가르치고 교회가 해석한 대로 배웠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는 언제나 성경의 해석과 관련하여 정통성의 기준이 돼 왔다. 성경 자체가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 3.15)라고 한다. 성경은 교회의 교과서다. 그러나 교회는 그 교과서를 가르치고 해석하는 살아있는 선생님이다.
성경이 항상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아니다. 이단들도 너나없이 성경에 호소한다. 삼위일체와 성육신을 부인하는 자들도 성경에 호소한다. "삼위일체"와 "성육신"이란 말은 성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성체" 혹은 "연옥" 혹은 "교황"은 더더구나 없다. 성경의 정경성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 말이다! 이 교리들 중 어느 하나도 성경에서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명시적이지 않다. 사실 이단들은 이 교리들 모두를 부인했다. 교리를 정의하고, 신조들을 정하고, 권위를 가지고 이단들을 파문하는 것은 사실 교회였다.
교회의 무오성 無誤性을 부인하면, 조만간 성경의 무오성을 부인하게 된다. 이점은 개신교의 역사가 잘 보여주는 바다. 어떤 결과도 원인보다 더 클 수는 없다. 선생을 신뢰하지 못한다면 왜 선생의 책을 신뢰해야 하는가?
시간이 흐르면 근대주의자가 되는 것이 상례다. 보수를 자처하는 남침례교도들조차도 백년 혹은 이백년 후에는 근대주의자가 될 것이다. 가톨릭 근대주의자들도 많다. 그러나 교회는 그들을 공식적으로 단죄했다. 가톨릭교회는 역사를 통틀어 어떤 이단에도 굴복하지 않은 유일한 교회다. 다른 교회가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요 16.13)는 그리스도의 약속을 입증하고, 그분 자신의 권위("너희의 말을 듣는 자는 내 말을 듣는 것이다")로 가르친 게 아니다. 가톨릭교회는 그리스도 자신이 오류요 따라서 신이 아니지 않는 한, 오류가 없는 권위로 가르쳤다. 역사를 통해서 교회의 마기스테리움(magisterium, 가르치는 권위)은 이단이라는 파도가 반복해서 들이닥쳐도 다시 바다로 돌아갈 수밖에 없고, 해안선을 따라 지어진 집들이 수해로부터 안전하도록 지켜주는 방파제와 같은 역할을 늘 해왔다. 거룩한 어머니 교회가 이단들에게 화난, 무서운 표정을 짓는 것은, 오로지 교회의 자식들에게 웃는 얼굴을 하기 위함이다. 어미 곰은 새끼 곰을 보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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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도들은 보통 (1) 일곱 가지가 아니라 오직 두 가지 성례만이 있다. 이 둘은 훨씬 더 중요하다(양보다 질이기 때문이다), (2) 성례들은 그 자체로는 객관적으로 은혜를 주지 않는다. (엑스 오페라 오페라토, ex opera operato.) 은혜는 하나님만이 주신다. 그것도 개인의 믿음과 경건으로 주관적으로 받는다고 믿는다. 개신교도들은 성례들이 그분을 향해 올라오도록 우리에게 주신 사다리와 같다고 믿는다. 가톨릭교도들은 성례들이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내려오시기 위해서 스스로 마련하신 사다리와 같다고 믿는다. 성례들에 대한 가톨릭의 시각은, 그것들이 구원의 수단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제가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분의 권위로 사죄를 선언할 때 당신의 죄들을 용서하신다. 당신이 세례 받을 때 실제로 당신의 영혼을 재생하시고 원죄를 치워버리신다. 성만찬을 받을 때 그리스도가 당신의 영혼과 영적인 결혼을 통해 당신과 연합하신다. 가톨릭교도들은, 우리가 어떻게 2천년이라는 시공을 뛰어넘어서 "그리스도와 동시대"에 있을 수 있는가, 혹은 훨씬 더 나은 쪽으로 묻자면, 어떻게 그리스도가 시공을 넘어 우리와 함께 계실 수 있는가는 키에르케고르의 질문(철학적 단상들과 비학문적인 후기의 결론에서 제기함)에 대한 답이 바로 성례전들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연상 안에서 영적으로, 주관적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성례전들에 동원되는 물질 안에서, 또한 그것들을 통해서 물질적으로, 객체적으로 만난다는 것이 답이다. 물질은 소중하다!
개신교도 시절 나는 가톨릭교회가 성례전에 대해 이렇게 가르치는 것을 알고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유치하고 물질주의적이며, 외형주의라는 인상을 받았다. 게다가 "요술 같고" 기계적이며 비인격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이 반론은 쉽게 제거됐다. 순전한 오해이기 때문이다. 성례전은 "요술적"이지 않다. 자동화 기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은혜를 막을 수 있다. 아니 다소간 종종 그렇게 한다. 수도꼭지를 잠그거나, 창문을 닫는 식이다. 그러나 물 혹은 빛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그리스도는 성례전 가운데서 우리를 만나 우리를 성결하게 하기 위해 실제로 오신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에게 감사하는 법이 거의 없다.
요술은 일방통행이다. 나무에 못을 박는 것 같다. 나무는 꼼짝없이 놓여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성례전은 쌍방향이다. 미안하지만 성교와 같다. 그분은 신사다. 우리를 유인하지만 결코 겁탈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분의 은혜 앞에서 수동적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능동적이 된다. 성례전을 통한 은혜는 다른 모든 은혜와 마찬가지로, 두 조각을 붙이는 본드풀과 같다. 우리의 영혼을 우리의 구주님에게 붙이는 것이다. 그러나 본드풀이라는 유비는 불완전하다. 접합시키는 힘의 반은 본드풀이 발라진 각 조각면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례전에서의 모든 힘은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그러나 이 유비는 한 가지 유익한 요점을 말하고 있다. 우리와 하나님, 이렇게 두 편 모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자유의지 없이 자동으로 요술을 행하시면 하나님이 아니다. 은혜를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자유의지가 없으면 우리는 은혜를 얻을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를 받으려는, 은혜에 의지하려는, 은혜를 믿으려는 우리의 자유의지 없이는 은혜를 주지 않으신다. (성경은 "믿음"과 "받음"을 같은 것으로 본다: 참조 요 1.12). 하나님은 성례전 없이도 은혜를 공급하실 수 있지만, 우리의 동의 없이는 우리에게 믿음을 제공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 없는 하나님의 성례전이 우리를 구원하지 않는다(성례전은 요술이 아니다). 그러나 그분의 성례전 없는 우리의 믿음은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잃어버렸던 자신의 조각(성례전)을 만들어내실 수는 있으나, 우리가 잃어버린 절반(우리의 믿음)을 대체할 수는 없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신교도들이 성례전 없이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을 때, 그것은 기적이고, 상례를 벗어난 일이며,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에서 비껴나간 일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집에 뒷문으로 들어온 것이나 진배없다. 그러나 가톨릭교도들이 믿음과 성례전으로 구원받을 때, 이것은 마땅한 일이고, 정문으로 들어온 것이며, 두 조각이 딱 붙은 것이다.
성례전은 말하자면 호스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생수를 실어 나르는 통로다. 우리의 믿음은 수도꼭지를 트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이 꼭지를 활짝, 조금 틀 수도 있고, 아예 안 틀 수도 있다. 꼭지가 잠겨 있으면, 물이 우리에게 흘러오지 않는다. 물이 객관적으로 있는 게 분명해도 안 흐른다. 믿음으로 꼭지를 "틀 때" 물이 흘러 우리에게로 온다. 와서 우리를 적신다. 그러나 물은 이미 거기 있었다. 수도꼭지 자체는 물을 흐르게 하지 않는다. 다만 물이 흐르지 못하게 할 뿐이다. 물을 막을 수는 있지만, 물을 있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호스를 쓰지 않고도 우리에게 물을 흘려보내실 수 있다.
개신교는 여전히 기독교다. 그러나 온전한 기독교가 아니다. 왜냐하면 "엑스 오페레 오페라토"의 성례전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엑스 오페레 오페라토"란, "일하시는 분[하나님]의 일에 의해"라는 뜻이다. 이는 "엑스 오페레 오페란티스" ex opere operantis 즉 '작용을 받는 자[인간]의 일에 의하여"와 반대가 된다.) 개신교도들에게 이 말이 충격적으로, 아니 도발적으로 들리기 때문에, 개신 "교회들"은 진정한 교회가 아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의 교회가 있기 때문이다. 이 교회는 사도적인 계승과 제사장직을 가지고 있어서, 성례전에 그리스도의 현존을 모실 자격이 있다. (말하자면 사제는 오로지 반응을 촉진시킬 뿐이다. 원인은 하나님이시다. 사제는 창조하지 않는다. 그는 재생산할 뿐이다.) 개신 "교회들"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선임하신 선지자, 제사장 혹은 왕이라는 세 가지 직임 중 어느 하나도 사도적인 계승을 하고 있지 않다. 그들은 성별된 주교직의 사도적 계승을 하지 않는다. 이 교회들에는 성례전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모시는 중개자인 성별된 사제직의 사도적 계승이 없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스리는 권위를 사도적으로 계승하지 않았다. 그래서 가톨릭교회가 그들을 "교회들"이라 하지 않고 "교회적인 공동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개신교는 여전히 기독교다. 교회의 충족성과 성례전에서 부족하지만, 가톨릭교회는 공식 교칙에서 "하나님이 성례전 밖에서도 활동하실 수 있다"고 선언하였다. 사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신다. 개신교는 여전히 복음이다. 개신교를 믿어도 구원받는다. 당신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힌두교 혹은 불교, 혹은 이슬람교를 믿어서는 구원받지 못한다. 이 종교들 안에 있는 많은 것들이 당신을 상당히 현명하고 선량하게 만들어줄 수는 있다. 오로지 그리스도만이 당신을 구원하실 수 있다. 힌두교도 혹은 불교도 혹은 무슬림이 구원받을 때는, 그들의 종교 때문이 아니라 숨어 계시는 그리스도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다.
이렇듯 성례전은 "요술"이 아니다. 그러나 개신교도 시절 내 마음에는 성례에 대해 이보다 더 근본적인 억하심정이 있었다. 성례가 "이방적"이다, 즉 물질주의적이라는 혐의였다. 가톨릭교회에 따르면, 가톨릭교회의 영성체를 받으면, 그리스도가 친히 세우신 사도들에게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사도적 계승의 고리에 의해서 정당하게 안수 받은 가톨릭교회 혹은 동방정교회 사제에 의해서 성결함을 받으면, 당신은 실제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개신교 목사가 베푸는 성례를 받으면, 그 목사가 아무리 거룩한 자라 해도, 또 당신 자신이 아무리 경건해도, 그 거룩한 빵을 먹고 거룩한 포도주를 마시는 그 순간에 당신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아무리 깊고 불타올라도, 그리스도의 문자적인, 객관적으로 실제인 몸과 피, 영과 신성을 받는 게 아니다. 당신은 그저 종교적인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점 때문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서서히 나는 내가 받은 충격에 오히려 충격을 받게 됐다. 내가 영지주의자였다는 점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개신교도로서 성경에 있기에 내가 믿고 있던 다른 많은 것들, 혹은 믿는다고 생각하고 있던 것들 역시 똑같이 충격적으로 "물질주의적"이었다. 예를 들어보자. 누가복음 8장 43-48절에는 오랜 시간을 출혈 과다로 시달린 여인이 등장한다. 만약 이 여인이 사도 베드로의 옷깃, 혹은 다른 어떤 사람의 옷깃을 만지면서, 그것이 그리스도의 옷이라고 진정으로 믿었다면, 그리스도가 자신에게서 권능이 "빠져나간 줄"로 아신 그 치유의 기적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사도요한이 실수로 다른 십자가 아래 서 있다가 착한 강도의 피가 그의 머리에 떨어졌다면, 비록 요한의 영혼은 거룩한 상태에 있었는지 모르지만, 구원을 주는 보혈을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만약 그리스도가 문자적으로, 신체적으로 죽지 않았다면, 말 그대로 피를 흘리지 않았다면, 그냥 다니면서 설교하고 가르치고 고쳐줬다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물질주의적이시다! 그리고 성례전들은, 가톨릭교도들이 이해한 대로, 성육신의 논리적인 연장일 뿐이었다. 하나님의 동일한 전략이다. "나쁜 생각을 하면 타락할 것이다"가 아니다. "이 금지된 과실을 먹으면 타락할 것이다"다.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으면 구원받을 것이다"가 아니다. "구세주의 몸과 피를 받으면 구원받을 것이다"다. (고전 11.27-29)
그래서 나는 서서히 알게 됐다. 성례전에 관한 가톨릭교회의 교리가 사도들과 신약성경의 "단순한 기독교"에 덧붙인 첨가물이 아니고, 오히려 개신교의 교리가 거기서 무엇을 뺀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충격이었다. 큰 충격이었다. 단지 교리가 문제가 아니었다. 이 문제는 호랑이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그분을 "호랑이 그리스도"라고 말했다. C. S. 루이스는 그분을 사자라고 했다.)
"가톨릭 모태신자"들에게는 친숙함이 이 충격을 완화하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충격에 면역력이 생긴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해선 안 된다. 성도라면 이 충격에 면역력을 기르지 않는다. 이들이 그리스도와 훨씬 더 친근해지면, "예수충격"은 줄어들기는커녕 늘어난다.
"가톨릭 지성인들"에게도 위험이 있다. 현존 교리가 현존을 대신해버리는 것이다. 마치 저 유명한 달 가리키는 손가락 경구처럼, 따라가며 보지 않고 들이파듯 보는 것이다. 혹은 욥의 세 친구들처럼 하나님에 대한 신학을 하나님 자신인 양 처우하는 것이다. 욥의 신학은 틀렸다. 그러나 투명했다. 그는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을 다뤘다. 그는 헷갈리고 틀리기는 했어도 그의 개념을 지나쳐서 보았다. 그래서 그는 너무 짧은 순간이었고 거의 눈을 감고 보듯 보았지만 하나님을 보았다. 그러나 세 친구들은 정확한 개념들에 매달리듯 보았다. 그것들을 흘려보지 못했다. 결국 욥은 하나님을 보았지만 그들은 보지 못했다. (욥 42.1-6 참조)
C. S. 루이스는 이 중요한 철학적 요점, 따라가며 보는 것과 매달려 보는 것의 차이를 그의 에세이 “창고에서의 명상” Meditation in a Toolshed에서 설명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따라가며 봐야 할 것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매달려 봐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수단이고 하나님은 목적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피조물일 뿐이어서, 창조주로 대접하면 우상이 된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고 하나님은 절대자이시다. 그리스도는 절대적이며 상대적이다, 하나님이며 사람이다, 창조주며 피조물이다, 매달려 봐야 할 하나님이시며, 따라가며 봐야 할 하나님의 아이콘이다. 하나님 자신이며 하나님의 말씀이다.
마침내 나는 알게 됐다. 다른 모든 개신교도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영지주의에 감염돼 있었다(체스터턴의 말을 빌리면, 영지주의는 “무서운 멸망의 영성”이다). 아울러 영지주의에도 두 가지가 있는 것을 알았다. 지적인 영지주의와 정서적인 영지주의인데, 나는 이 둘 모두에 빠져 있었으나 특히 정서적인 영지주의에 걸려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리스도에 대한 경건한 감정을 그리스도의 현존으로 바꿨다. 그리스도의 현존을 부인하는 한 심각한 회의론자의 논증에 깊이 매료돼 있었다. 그의 말은 이런 것이다. “평생에 걸쳐 수없이 시행하는 성례전들이 있는데, 그 중 어떤 것이 마치 그리스도가 우리가 걷는 길거리에 나타나신 듯 생생한 것이란 말인가? 그리고 대체 어떤 차이가 있단 말인가? 나는 차이를 알 수 없다. 차이를 느낄 수도 없다. 정말 예수가 나타난다면, 그분이 어떻게 숨 막히는 차이를 만들지 않는단 말인가? 왜 모든 가톨릭교도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더 거룩하고 더 행복하지 않은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모신다면 말이다.” 이 질문은 내가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하버드 신학대학원 학생들에게 묻도록 한 그 질문과 거의 같다. (39 페이지를 보라.)
우리는 그분을 옛적 이스라엘에서 보았다. 그리고 가끔 우리 마음에 계시는 그분을 느낀다. 이 둘은 소중한 임재가 맞다. 그러나 우리는 성례전에서는 그분을 보지 않는다. 거기서는 그분의 임재를 느끼는 법이 거의 없다. 그분이 거기 계시다고 받아들이는 것은 감각 혹은 느낌이 아니라 순전한 믿음이다. 이 믿음은 보는 것 혹은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값지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들보다 몇 갑절 특권을 누리고 있다. 그분 자신이 의심하는 도마에게 말함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너는 나를 보았으므로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요 20.29)
이 말씀을 믿는가?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더 복되다고 느끼지 않는다. 지금 그분을 본다면, 환상 중에서라도 그런다면, 혹은 타임머신을 타고 주후 30년 이스라엘에서 그분을 만난다면, 훨씬 더 복 있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에게 이러한 나타남이 우리를 속일 수 있다고 말씀한다. 이것은 마치 하늘이 푸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나 같다. 이런 말을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말씀하는 분이 그분이시기에 믿을 수 있다. 과학자들이 고체가 딱딱하지 않다, 공간이 휘어 있다, 시간은 상대적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들을 믿는다. 사실 하늘은 전혀 푸르지 않다. 단지 푸르게 보일 뿐이다. 여러 색깔들을 머금었다가 푸른빛을 방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에 대해서 말씀할 때 창조주를 믿어야 하는데도, 과학자들이 창조에 대해 말할 때 그들을 더 기꺼이 믿으려 한단 말인가?
보지 않고 믿음에서 소중한 것은 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믿는다는 것이다. 보고 느낌이라는 목발들을 치워버릴 때 믿음의 근육이 강화된다. 그분을 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보았지만 돌아서서 가버렸다. 아니 심지어는 소리 질렀다. “그를 못 박으시오!” 마음으로 그분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느낌이란 주관적이고, 우리 자신에 속한 것이고, 오류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하나같이 자기중심적인 경험의 중독자들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긍정적인 즐거움과 행복의 경험에 너무나 중독돼 있어서, 만약 그리스도를 더 즐겁게 경험한다면, 그리스도 자신보다는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거의 무방비 상태로 사랑하게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경험을 경배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경험을 경배한다는 말은 우리를 경배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굳게 확신할 수 있다. 그분은 우리가 “영혼의 어두운 밤”에 지적으로뿐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깨어 있도록, 그리고 느낌이 아니라 믿음에 의지하는 훈련을 하도록 그분 자신이 하고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계시다. 이 말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말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의지하도록 훈련받는다는 것이다. 이해하기는 참 쉽다. 하지만 받아들이기는 정말 어렵다.
영성체는 모든 훈련 도구들 중에서도 가장 완벽한 도구다. 그 이유는 (1) 그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전혀 아니다, (2) 통상 그분에 대한 어떤 느낌을 주지도 않는다, (3) 그렇지만 우리에게 그분에 관한 모든 것, 그분의 완전한 현존을 준다, (4) 그것은 믿음만으로 감지된다. 우리는 즐거움을 갈망한다. 그런데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이 우리의 즐거움이라 하신다. 그리고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시는 게 아니라 우리 안에 그분이 거하시겠다고 하신다. (요 15.11) 그는 수단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의 즐거움은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우상숭배다. 그분이 목적이다.
하늘나라에는 우상숭배자들이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그분은 경험 중독증에서 우리를 떼어 내셔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믿음과 사랑을 우리 자신이 아니라 그분에게로 돌려놓으셔야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즐거움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실제로 임재 하여 계시는 그분을 모신다. (마 28.20). 따라서 우리는 비록 느끼지 못한다 하더라도 즐거움을 얻는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 외에는 어떤 것도 필요치 않다. 그리스도 플러스 즐거움이 필요한 게 아니다. 그리스도 플러스 경험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가지 더 필요한 게 있다. 우리에게 오직 그리스도만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영성체가 우리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을 때면 우리에게 뭔가 잘못된 게 있구나 하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기 때문에 와 닿지 않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실수하지 않으시기에 와 닿지 않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믿음 안에서 훈련시키신다. 두 발 자전거 위에 올라가 있는 우리에게서 아버지의 손을 떼신다. 그래서 우리를 붙잡고 있는 손을 느끼게 하기보다는 믿음의 바퀴에 올라 앞으로 나가는 법을 배우게 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약함을 너무나 잘 아신다. 그래서 우리의 감정 중독증도 아신다. 한 번 더 느끼게 해달라는 요청을 부드럽게 거절하신다. 그분은 영적인 충치가 생기게는 하지 않으신다.
믿음과 느낌에 관한 유명한 말이 있다. 중국 기독교 작가 워치만 니가 한 말로 기억한다. 사실, 믿음, 그리고 느낌은 성벽 위를 기어오르는 세 사람이다. 사실이 먼저 가고, 믿음이 그 뒤를 잇고, 느낌이 맨 마지막으로 간다. 믿음이 앞서 가는 사실을 계속 바라보는 한, 이 셋 모두는 성벽을 기어오를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이 그 눈을 사실에서 떼서 뒤로 돌아 느낌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보는 순간, 믿음은 벽에서 떨어지고 이어 느낌도 벽에서 떨어진다. 그러나 사실만은 성벽에 계속 붙어 있다. 요점은 명확하다. 우리 믿음의 대상은 느낌이 아니라 사실이다. 주관적인 경험이 아니라 객관적인 진리다.
이것은 신비스러운 갈망, “센수크트” Sehnsucht를 열 수 있는 열쇠이기도 하다. C. S. 루이스는 이것에 대해 아주 명료하게 표현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향한 갈망, 영성체에서 발견돼야 하는 분에 대한 갈망이다. 우리는 어디에서나 “그분의 얼굴을 추격한다.” (제임스 테일러 James Taylor의 시 “새로운 찬송”에 나오는 가슴 두근거리는 구절에서 인용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이 외로운 사냥꾼”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은 그분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는 쉬질 못한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은 객관적이고 또한 주관적인 복됨의 두 부분이 하늘나라에서 완성될 때 오직 그분 안에서 온전하게 안식할 수 있다.
C. S 루이스는 조지 맥도널드의 말을 인용해서, 그 보이지 않는 장미향에 취했다면 그때가 오기 전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일하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목표로 삼는다고, 우상으로 만든다고 갈망은 돌아오지 않는다. 불꽃은 “잘 탈 것 같지도 않은 교의와 윤리의 연료,” 믿음과 행위, “신뢰와 순종”(1921년에 지어진 J. H. 삼머스 목사의 찬송가 제목)을 “부어 넣어”야만이 타오를 것이다.
이 “신뢰와 순종”이 특히 영성체에 적용된다. 그분은 말씀하셨다. “받아먹어라.” “받아서 느껴라”가 아니다. “받아 이해하라.”도 아니다. 그는 말씀하셨다. “이것은 내 몸이다.” “이것은 내 이성이다”가 아니다. 소크라테스와 솔로몬과 아퀴나스와 부처는 우리에게 그의 이성을 남겼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그의 몸을 남겼다.
키에르케고르의 말대로, 성육신이 “절대적인 역설”이라면, 영성체는 버금가는 절대적인 역설이다. 우리에게는 이런 것이 필요하다. 이성과 이해력으로는 획득할 수 없는 객체, 시각 혹은 감각이 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것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순전한 믿음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신을 보는 것, 맛보는 것 그리고 만져보는 것도 그 나름대로 속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귀만은 마음 놓고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신 모든 말씀을 저는 믿습니다./ 진리의 말씀보다 더 진실한 표지는 없습니다.” (아도로 테 데보테 Adoro Te Devote, 나는 당신 앞에 엎드려 경배합니다, 아퀴나스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성례전의 시) 혹은 같은 원리를 남침례교도들의 말로 옮기자면 이렇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니 내가 믿습니다. 이것으로 족합니다.”
실화다. 사제가 병상에 누워있는 환자에게로 영성체를 모시고 갔다. 그 환자는 수없이 영성체를 받았지만 별다른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다. 며칠 뒤 신부는 그 환자에게 그 날 병실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별일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요, 신부님?" "오늘 선생님이 병실로 들어오기 몇 분 전에, 저쪽 병상에 계시던 여자 분이 의사로부터 최종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가망 없다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말을 들었거든요. 여자 분은 가망이 없나 봐요. 그런데 그 여자 분이 잠시 후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병실로, 자기 몸 안으로, 영혼으로 들어오셔서, 이제 어두움이 모두 물러가고 모든 게 밝은 빛이라더군요."
우리가 느낌을 마음의 보좌에서 끌어내릴 때, 하나님은 오셔서 우리에게 선물을 주실 수 있다. 이 선물은 믿음과 나아가서는 바른 느낌, 이 두 가지 모두다. 이 선물을 결코 우리가 우리에게 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의 시간표에 맞춰서가 아니라 그분의 시간표에 맞춰서 그 선물을 주신다. 그분은 연인이지 열차가 아니다.
나는 영성체를 사랑한다. 그것이 나의 시각, 나의 이성 혹은 나의 느낌에 호소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 몸(모든 면에서 타락한 인간 본성)에 호소하지 않는다. 그래서 영성체는 내게 진정한 복됨을 허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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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핵심적인 진단을 요약하여, 핵심만을 간추려보자. 복됨에는 두 면이 있다. 한 면은 행복이다. 이 말을 좀 더 근대적으로, 주관적으로 바꾸면 경험이다. 다른 면은 진정한 객체의 현존이다. 이것이 경험을 일으킨다. 이 객관적인 부분은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분이 우리의 이생에서 스스로를 성례전 가운데서 우리에게 온전하게 펼쳐 보이신다. 주관적인 절반은 다음 세상에서야 온전하게 펼쳐진다. 우리는 아직 그것에 준비되지 않았다.
이런 진단에 비추어서, 우리의 처방전은 논리적으로 다음과 같다. 이생에서 "점프 스타트" 하듯 일어날 수 없는 주관적인 부분은 무시하라. 그리고 객관적인 부분에만 집중해라. 이 부분은 충분히 드러나 있고 움직인다. 이것만이 주관적인 부분을 길들이는 길이다. 당신 자신을 잊어버려라. 그러면 당신은 완성될 것이다. 당신 자신에 대해서 죽어라. 그러면 살 것이다. 당신의 믿음을 믿지 말고, 그리스도만을 믿어라. 그리스도만에게 믿음을 두면, 믿음을 믿을 여력도, 우상숭배를 할 여력도 없다. 달고 맛있는 디저트는 주요리가 아닐 때만이 안전하다.
개인뿐 아니라 교구와 지역교회에도 적용된다. 한 교구의 그리스도 자신의 현존에 대한 믿음과 집중, 그리고 교구 자체, 혹은 "공동체"-즉 그분의 임재가 아니라 우리의 임재-에 대한 집중 사이의 차이는, 살아 숨 쉬는 교구와 반쯤은 죽은 교구의 차이를 설명해준다.
저런 따분하고 믿음 없는 근대주의자들이 모인 교구들과, 모호하고, 추상적인 구호들과 이념들로("자애," "평화와 정의," "나눔과 돌봄," "공동체의 섬김이" 등등) 치장한 "가톨릭" 대학들이 왜 세워지고 존재하는지 자주 의아스럽다.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아니라, 인간이 하는 일에 초점을 둔다. 예배에서나 세상에서나 마찬가지다. 현존에 대한 믿음은 오래 전 상실해서, 무엇을 상실했는지도 모를 지경이 됐다. 죽은 지 오래 돼 죽었는지도 모른다. 죽은 영혼이 예수의 현존이 사라졌다 한들 전전긍긍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장난감 호랑이를 가지고 논 데서 꺼릴 것이 무어란 말인가? 니체가 말했다. "신이 죽으면, 교회는 신의 무덤이 된다." 니체는 신의 무덤이 된 교회들을 방문해봤던 것 같다.
모던니스트를 자처하는 자들이 예배가 이루어지는 성당을 짓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들은 학교 혹은 사무실 같은 빌딩을 짓는다. 이것은 단지 미학적 기호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신앙의 문제다. 영성체에 나타나는 현존을 믿는 믿음만이 저러한 성당들을 짓게 한다. 저런 건물들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지어진다. 성육하신 하나님을 맞아들이기에 합당한 장소를 만들고, "여관에는 방이 없었다"(눅 2.7)는 그 추문을 될 수 있으면 통 크게 없애보려는 시도인 것이다. 이런 성당들은 그리스도의 발 앞에서 깨진 그 여인의 향유의 옥합이다. (마 26.7, 눅 7.37)
성당은 하나님을 밀회하는 성이다. 두 열정이 만나는 열정의 왕궁이다. 사랑에 반응하는 사랑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인간의 놀란 사랑이 사람에 대한 그리스도의 놀라워하시는 사랑에 반응하는 곳이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하늘에서 십자가로 내려오셨다. 그래서 우리는 중세의 과학기술이 허용하는 한 성당들 안에서 (아니 그 이상으로!) 하늘로 올려졌다. 이는 세상에 십자가에 처형된 한 범죄자의 모습으로 은닉하신 그분의 신성의 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보이시기 위함이다. 그리고 누룩을 넣지 않은 작고 초라한 빵조각의 모습으로 은닉하신 그분의 비할 수 없는 인성의 아름다움 또한 보이시기 위함이다.
베드로는 변화산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반응했다. "내가 여기에다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에는 주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겠습니다." (마 17.4) 어린애 같은 말이다. 그러나 이는 순진무구한 말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이 순진무구한 소원은 천 년 후에 그의 막연함을 훨씬 넘어서는 수준으로 이뤄졌다. 세계의 기독교가 그 산정에서 베드로를 사로잡았던 동일한 비전, 즉 예수 그리스도의 충격적인 아름다움에 관한 환상에 사로잡혀, "초막" 세 개 정도가 아니라 훨씬 웅대한 성당들을 노트르담, 샤르트르, 웨스트민스터, 쾰른에 지은 것이다.
이제 마지막 충격이 남았다. 당신이 성당이다.
사람은 성당이다. 하나님은 건축자다. 성당보다 당신이 훨씬 더 기적을 보는 듯 아름답다. 당신은 초자연적으로 아름답다. 물론 성당들도 초자연적으로 아름답다. 당신은 몸, 물질, 시간 그리고 공간에 거룩하신 하나님을 모실 수 있도록 설계됐다. "여러분의 몸은 성령의 전입니다." (고전 6.19)
천사가 마리아에게 고지한 일은 그의 자궁에서 이뤄졌고, 우리의 영혼에서 역시 이뤄졌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가장 높으신 분의 능력이 너를 감싸 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한 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눅 1.35) 세례 시 이 일이 우리에게 일어난다. 예수는 우리가 그분 안에서 "거듭 날" 때 우리 안에 태어나신다. 이것이 인간의 가장 고상한 아름다움이며 영광이다.
성당이 역사상 가장 완벽한 건물이듯이, 인간의 몸은 우주의 역사에서 가장 완벽한 유기체다. 무엇 때문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다. 이것이 인간의 영광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이기 때문이다.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영광은 온전하게 살아있는 인간이다." 그가 흐릿한 휴머니즘을 말한 것이 아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말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날 때" 만이 충만하게 살아있다. 우리는 사도바울과 더불어서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갈 2.20)라고 말할 수 있을 때만이 충만히 살아있다. 우리는 완전히 죽었을 때만이 충만히 살아있다. "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골 3.3)
(어쩌면 "인간의 영광"이라 하지 말고 "인간의 존엄"이라 하는 편이 훨씬 나을 수도 있겠다. "존엄"은 회색적이고, 존경할 만하고, 무난하고, 자의식적이고, 우쭐 하는 단어다. 그러나 "영광"은 거칠고, 시적인, 정신 나간, 불똥 튀는, 확 내뱉어야 하는 단어다. 이 말에는 밝은 푸름과 화염의 노란색이 어우러져 있다. "존엄"은 부엉이 같은 말인 반면 "영광"은 독수리 같은 말이다. 교회가 영성체를 받드는 집기를 무엇으로 장식했는지 그 직관력을 확인하라. 우리 혹은 안전망이 아니라 태양처럼 빛나는 불꽃이다. 우리가 "예수충격"이라고 부른 영혼의 현상을 심리적으로 완벽하게 표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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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들에 나오는 "예수충격"의 사례들을 여럿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충격의 원인이 그분의 현존이라고 설명했다. 이 현존은 성례전에서 지속된다. 복음서들에 나오는 "예수충격"의 한 사례가 돋보인다. 그것이 영성체를 꼬집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6장을 보자.
여기서 충격은 현재가 아니라 그분의 미래적인 약속 때문에 생긴다. 예수는 이미 육체로 현존하신다(이것도 충격 중의 충격이다). 그러나 그는 충격 그 이상의 어떤 일을 하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들에게 자신의 몸을 먹도록 해주겠다는 것이다.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만약 "나의 몸을 먹고 나의 피를 마셔라"는 충격적인 구절의 두 가지 의미를 정교하게 연결하고 있는 예수를 발견하지 못하면, "요점 잡기"는 물 건너가고, 따라서 충격은 희석되고 만다. 이 둘은 물론 예수가 우리에게 실제로 그의 몸을 먹으라고 내준 두 번의 역사적인 사건에 연결돼 있다. 즉, 십자가와 성례전이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문자적으로는 그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세상 안으로 들어온 몸과 피를 물리적으로 그리고 문자 그대로 우리는 받았다. 그리고 오직 이것 때문에 유일한 희망, 유일한 구원을 받았다. 성례전에서 그는 문자적으로 피를 흘리고 다시 죽지 않는다. 십자가에서 한 번의 희생으로 "영원히 단번에"(히 10.10) 그리고 "다 이루었"(요 19.30)기 때문이다. 이 희생은 되풀이 되지 않으나 "피 흘리는 일 없이" 거듭 제공된다. (가톨릭교회 교칙 1367; 트렌트 종교회의(1562): DS 1743; 참조 히 9.14, 27) 그러나 우리는 성례전에서 그분의 몸과 피를 실제로 먹고 마신다.
그분은 "몸 그리고 피, 영혼과 신성"으로 이 두 사건에서 실제로 임재 하고, 충만히 임재 한다. 두 사건 모두 실재다. 그러나 사건의 절반은 물리적이고, 다른 절반은 그렇지 않다. 그분의 몸은 십자가에서 물리적으로, 화학적으로 내어줌을 당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우리 입으로 물체로서 또 화학적으로 받지 않는다. 성례전에서의 그의 자기 내어줌은 더 이상 물리적이고 화학적이지 않다(영성체를 화학적으로 분석하면 빵일 뿐이다. 아울러 그분은 다시 몸으로 죽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을 물리적으로 또 화학적으로 받는다.
요한복음 6장이라는 이 오래 된, 친숙한 갱 坑에서 어떤 새로운 보석을 캘 수 있을지 한 번 보자. 6장은 닳아 없어지지 않는 보석들을 내놓는다. 이 갱은 그 밑이 닿을 수 없을 만큼 깊다. 이 갱도는 하나님의 마음으로까지 내려가 있다.
유대 사람들은 예수께서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빵이다" 하고 말씀하셨으므로, 그를 두고 수군거리면서 말하기를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부모를 우리가 알지 않는가? 그런데 이 사람이 어떻게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고 하는가?" 하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의 조상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다. 그러나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빵은 이러하니, 누구든지 그것을 먹으면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나의 살이다. 그것은 세상에 생명을 준다." 그러자 유대 사람들은 서로 논란을 하며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에게 자기 살을 먹으라고 줄 수 있을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또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 속에는 생명이 없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있을 것이요,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다........예수의 제자들 가운데서 여럿이 이 말씀을 듣고 "말씀이 이렇게 어려우니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하고 말하였다........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고, 그를 따르지 않았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물으시기를 "너희도 떠나가려느냐?" 하시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선생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요 6.41-68)
처음 발설하셨을 당시 예수 말씀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던지 제대로 알기란 아마 쉽지 않은 것 같다. 이 말씀들이 낯익은 것이기도 하려니와 우리가 유대인들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대인들에게는 모세 율법, 즉 하나님의 율법이 있어서 인간의 살을 먹거나 어떤 피든 피를 마시는 것을 엄격하게 금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집안에 속한 사람이나 또는 그들과 함께 사는 외국 사람이, 어떤 피든지 피를 먹으면, 나 주는 그 피를 먹은 사람을 그대로 두지 않겠다. 나는 그를 백성에게서 끊어 버리고야 말겠다. 생물의 생명이 바로 그 피 속에 있기 때문이다. 피는 너희 자신의 죄를 속하는 제물로 삼아 제단에 바치라고, 너희에게 준 것이다. 피가 바로 생명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죄를 속하는 것이다." (레 17.10-11) 이 모세 의식법적 터부의 핵심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이 그분에 대하여 처녀처럼 순결하고, 짐승의 피와 관련하여 순전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피를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예수의 말씀은 충격을 준다. 식인 습관, 피에의 집착, 그리고 멕시코 아즈텍과 고대 가나안의 게헨나 골짜기 등에서 행해지던 지옥 예배에서의 인신제사와 너무나도 흡사하기 때문이다. 물론 정반대로 말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예식이 지옥의 예식을 고친 것이 아니라, 지옥의 예식이 그리스도의 예식을 어떤 면에서 흉내 낸 것이다.
내가 요한복음 6장에서 인용한 구절들은 빵 몇 덩어리와 물고기 몇 마리로 5천 명을 먹이신 기적 직전에 나온다. 이 표적을 베푼 후, 예수는 그 표적이 가리키는 바를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분 자신이었다. 그것은 어떤 물건이 아니라, "나눔과 돌봄," 혹은 관용, 혹은 동정심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이다. 그것은 그분 자신의 몸이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우리는 그가 되기 위해 그를 먹어야 한다. "만 이스트 바스 얼 이스트"(Man ist was er isst; "인간은 자기가 먹는 그것이다"). 썩는 빵(27절)을 먹으면, 썩는다. 썩지 않는 그 사람을 먹으면, 썩지 않는다.
빵의 "핵심"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잘못 묻는 것이다(33절). 그것은 요점이 아니다. 핵심은 한 인격이다! 예수는 더도 덜도 아니라, 만나가 의미한 바로 그것이다(31-32절). 그는 이제 다시 만나를 만드신다. 5천 명을 먹이신다. 그들에게 그분이 누구이신가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그 표적을 일으킨 분(만나를 준 이)이며 동시에 이 표적이 지시하는 바인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낭랑하게 말씀한다.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는 정확하게 그분을 지시한다. 그는 하늘에서 내려오셨다. 그러면 왜 내려오셨는가? 우리에게 참된 만나, 즉 그의 몸과 그의 피를 주기 위함이다.
그러면 왜 그는 그렇게 하셨는가? 왜 그의 지성, 그의 가르침, 그의 진리를 주고 말지, 그의 몸을 주셨는가? 우리가 그저 그를 알고 사랑하고 닮는 정도가 아니라, 그를 먹게 하시려는 까닭이었다. 그러면 왜 우리는 그를 먹어야 하는가? 그가 되기 위함이다. "너는 네가 아는 것이다"라든지, "너는 네가 흉내 내려는 것이다"가 아니라, "너는 네가 먹는 것이다"이다. 우리의 운명은 그리스도가 되는 것, 신이 되는 것, 동방정교가 그리스어로 표현한 대로라면 데오시스 theosis다. (이교적인 그리스 신비주의와 혼동 말라. 이것은 성경적인 개념이다: 벧후 1.4)
예수가 이 충격적인 언설을 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를 떠났다. (요 6.60) 개신교도들은 그 군중들을 따른 것 같다. 그러나 베드로와 그의 후계자들은 신실함을 지켰다. 그리스도에게, 그리고 그분의 말씀에 신실했다(66-68절). 그 후로 영원히, 오고 오는 세대를 거듭하여 내려오는 이 말씀은 언제나 정통 가톨릭의 시금석이 될 것이다. 베드로의 직임(후에 교황제로 불림)과 성례전 교리는 교회 역사를 통해서 언제나 함께 간다. 하나를 거부하는 자는, 결국에는 언제나 다른 하나도 거부한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특수성과 구체성이라는 비슷한 스캔들이기 때문이다.
정확한 성례전 교리의 문제가 아니다. 베드로와 그의 계승자들의 권위에 대한 바른 교리의 문제도 아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순정함의 문제다. 교황은 그리스도의 대리자고, 영성체는 그리스도다.
만약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하늘의 권세로서 묶기도 풀기도 하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약속 받은 베드로의 후계자가 아니라면, 죄된 베드로와 그의 죄된 후계자들이 그분의 교회가 선, 하나님이 내신 반석이 아니라면, 그래서 죽음과 지옥의 권세에 의해서 영원히 정복되지 않는 반석이 아니라면(마 16.13-19), 이런 약속들을 주장하는 교황은 거짓 선지자고 신성모독의 위선자들이며, 가톨릭교회를 존경하는 에큐메니칼 성향의 개신교도들은, 가톨릭교회를 혹평하는 고압적 근본주의자들에 비해서 더 자선을 베풀기는 해도, 논리적으로 일관성이 없는 사람들이 된다.
똑같은 방법으로, 만약 영성체가 그리스도 자신이 아니라면, 가톨릭교도들은 역사상 가장 터무니없는 자들, 치명적으로 해로운 자들, 멍청한 우상숭배자들 그리고 빵이 하나님인양 숭배하는 발칙하고 시체 집착증을 보이는 신성모독자들이다. (그들은 빵을 숭배하지 않는다. 그것은 빵이 아니다. 빵처럼 생겼을 뿐이다. 그것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처럼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이다.)
동일한 양자택일적 극단의 유형에 맞는 또 다른 스캔들이 있다. 그리스도 자신이다. 만약 그가 성육신 한 하나님이 아니면, 그는 문자 그대로 역사상 최악의, 가장 위험한, 가장 악한 인간이 된다.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고, 그리고 자신에게 당신의 영혼을 바치고, 모든 믿음, 모든 희망, 모든 사랑을 두길 원한다면, 그런데 그가 성육한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는 성육한 마귀이다. 발뺌할 여지가 없다. 너절한 중간지대란 없다. 논리의 법칙이 양자택일을 요구한다. 참이든 거짓이든 둘 중 하나다. 그 주장이 문제가 되는 한, 제3의 길은 없다. 어디에도 없다.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다.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주장은 모든 시간과 역사를 주전과 주후, 이렇게 둘로 나누는 칼이다. 철로의 분기점처럼, 전 세계인을 둘로 나눈다. 어느 노선이든 영원을 향해 달린다.
예수라는 똑같은 이름을 지닌 성경의 다른 인물도 이런 주장을 했고, 그의 백성들(하나님이 선택한 동일한 백성, 세상을 향해 뽑아놓은 그분의 집단적인 예언자인 백성)에게 위할 것인지, 아니면 반대할 것인지 동일한 절대적인 선택을 하도록 강요했다. 그의 이름은 여호수아였다. 그는 "여러분이 어떤 신들을 섬길 것인지를 오늘 선택하시오. 나와 나의 집안은 주를 섬길 것이오"(수 24.15)하고 말했다. 이 말은 수백 년을 두고 계속해서 울려나왔다. 반면 너절한 중간지대를 세워보려는 이런저런 모든 시도들에서 나오는 잡음은 사그라졌다.
나는 안다. 다른 많은 "인기 있는" 예수, 많은 대안적인 기독교, 많은 대안적인 기독론, 어정쩡한 중도를 만들어 이 끔찍한 양자택일에서 빠져나오려는 숱한 시도들이 있었다. 내가 이 대안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문제가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이것들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가 문제다. 그리고 복음서들은 이 문제에 대해 고통스러우리 만큼 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전쟁의 행위였다. 그리스도가 성례전을 세우신 것은 전쟁의 행위였다. 그리스도천국의 열쇠를 베드로에게 주신 것은 전쟁의 행위였다. 그분은 그것을 아셨다. 그분이 친히 말씀하셨다. 그분은 세상을 나누기 위해 왔다고 하셨다. 통일시키려고 오신 게 아니다. (마 10.34) 오늘날 세속주의적인 정신 조류는 틀렸다. 우리는 평화 시를 사는 게 아니다. 지금은 전쟁 중이다. "평화를 말하는 자, 평화가 없는데 평화를 말하는 자"들에게는 화가 있다. (렘 6.14) 이 전쟁은 육체와 피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치열하다. 이 전쟁은 마귀들에 대한 것이다. (엡 6.12)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성경은 그리스 신화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아름답고, 아무리 고상해도 거짓말과 신화의 직조물일 뿐이다.
"성례전" 혹은 "성례전의"라는 말은 웬만큼은 모호하게 "교회와 관련된"이라는 말로 들린다. 그렇다. 멋지고, 안전하고, 예의바르고, 적절하고, 지정돼 있고, 고색창연하고, 난해하고, 기술적이고 또한 "신학적"이다. 그러나 성례전은 안전하지 않다. 그것은 당신을 죽일 수 있다. 고린도전서 11장 27-30절을 참조하라.
성례전은 칼이다. 당신의 심장을 겨냥하고 있다. 내가 짜낸 계책, 내가 만든 이미지가 아니다. 이것은 순전히 성경의 논리다. 영성체가 그리스도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은 칼이다. (히 4.12) A=B=C=D.
"이것은 너희를 위해 주는 내 몸이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이 전쟁의 한 진영이다. 다른 진영이 있다. 그분은 바로 이 진영을 패배시키고 우리를 거기서 건지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이 진영도 말한다. "이것은 내 몸이다." 그러나 정반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말은 순교자의 자기희생이 아니라 자기밖에 모르는 자의 거만한 교만이다. 적그리스도의 영은 자신이 자유를 구가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노예에 불과한 자들을 통하여 이렇게 말한다. "이건 내 몸이요. 당신 몸이 아니요. 당신이 나를 지은 게 아니오. 당신은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할 권리가 없소. 나는 내 운명의 주인이요. 나는 내 영혼의 캡틴이요. 내가 죽을 때, 창피하게 회개 따윈 안 할 거요. 나는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노래할 거요. '나는 내 길을 달렸네.' 그러고 나는 내가 선택한 주님이요 모델이 다스리는 세계로 들어갈 거요. 아득하게 먼 옛날에 바로 똑같은 짓을 한 사탄이시라오. 이것은 내 몸이요. 그래서 마구 굴릴 거요. 인공중절할 거요. 동성연애할 거요. 아니, 내가 선택하면 자살할 거요. 나는 내 운명의 주인이요. 내 영혼의 대장이요. 내 몸이 좋아 하는 대로 무슨 일이든 할 거요. 내 몸이기 때문이요. 당신 몸이 아니란 말이오. 내 몸 속에 있는 태아도 사실은 내 것이오. 당신 것이 아니오. 아기 자신의 것도 아니오. 그 태아도 내 몸이요. 그래서 죽일 거요. 내가 그 애의 하나님이기 때문이오. 당신이 그 애의 하나님은 아니오." 보라. 낙태는 영성체에 대한 적그리스도 마귀의 패러디다. 그래서 신성모독의 정반대 뜻을 담아서 "이것은 내 몸이다"는 같은 거룩의 말씀을 쓰는 것이다.
5부:
우리는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런 일을 두고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롬 8.31) 이런 일을 두고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선한 싸움을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됩니까?" 이 질문은 요한복음 6.28에서 그리스도가 받은 바로 그 질문이다. 그의 대답은, 하나님의 첫 번째 일은 그를 믿는 것이라 하였다. (요 6.29)
그러므로 우리가 그를 믿는다면, 거꾸러져서 그를 경배할 것이다.
어디서? 그가 계신 곳 어디에서나다.
그러면 그는 어디 계신가? 많은 곳에 계시다. 여러 방법으로 계시다. 인간의 마음,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악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선을 위해 싸우는 멋진 사회적인 명분, 그리고 성경의 살아있는 말씀 안에 계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성례전에 계시다.
왜 "무엇보다" 거기 계시는가? 그곳에서만이 그가 온전히, 문자적으로, 전적으로 그리고 완벽하게 임재 하시고, 따라서 경배 받으시기 때문이다. 물론 거기에도 계시기는 하지만 우리는 가난한 자들, 성자들, 혹은 성경을 경배하지 않는다. 그분은 성례전에 계시는 식으로는 거기 계시지 않는다. 교회는 성례전을 "크리스천 생활의 원천이요 최고봉"이라 한다. (가톨릭교회 교칙 1324; 루멘 겐티움 11)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첫 번째 그리고 가장 큰 계명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것이 첫 번째 그리고 가장 큰 계명이다. 영적 전투를 명하는 사령관의 첫 명령이다. 그분은 성례전에서만 경배 받으시기 위해 충만히 임재 하신다. 따라서 성례전적인 경배는 거룩한 전쟁에서 취하는 모든 다른 행위들의 기초가 된다.
거룩한 전쟁이란 게 무엇인가? 권리, 혹은 의로움을 위한 전쟁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전쟁이다. 임시적인 몸이 아니라 영원한 영혼을 위한 전쟁이다. 이 전쟁은 구원 대 멸망, 하늘나라 대 지옥의 전쟁이다. 거친 근본주의라고 손가락질 하지 말라. 내게서 나온 게 아니라 예수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전쟁은 당신에게 관련된 것이다. 이 전쟁에 따라 하늘나라에 가든 못 가든, 나아가서 다른 사람이 하늘나라에 갈 수 있도록 돕든 못 돕든 하는 문제들이 결판난다. 이 전쟁은 당신의 뒷문에서 시작해서 거기서 끝난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책의 플롯에 따르면 그 엄청난, 전 세계가 참여하는 반지의 전쟁은 소인족 프로도의 헛간인 그 백 엔드의 문에서 시작해서 끝나는 것과 똑같다.
그렇다. 이제 성례전을 받기 전에 자주 그리스도만 남기고 홀로 돼라. 이것이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실천적인 사항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바라는 것보다 훨씬 빨리 그날이 온다. 그날에 당신은 그분과만 있게 될 것이다. 다시는 친구들이나 가족들이나 집이나 세상의 쾌락으로 돌아갈 수 없다. 당신은 영원의 경계선에서 그리스도와만 있게 될 것이다. 그분과 홀로 있게 되는 그 중대한 순간을 맞을 때까지 왜 기다리려고만 하는가? 왜 연습하지 않는가?
최고의 연습은 한 덩어리가 되는 것, 즉 미사다. 하늘나라가 공동체적이듯(성경은 하늘나라를 은밀한 신비경험으로 묘사하는 법이 없다. 성경의 하늘나라는 언제나 공중예배다), 이 땅도 그렇다. 앞서 말한 성당들은 개인적인 경배를 위해 영성체를 모시기 위해 지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무엇보다 공중의 미사, 예배, 오푸스 데이 opus dei, 즉 하나님의 일, 모든 시간과 공간에서 거듭 거듭 현재가 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졌다. 영성체가 성육신의 연장선이라면, 미사는 성육신의 어린자식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예배"와 "예배의"라는 말은 "교회 냄새 나는"이라는 말로 들리고, "교회 냄새"가 난다는 것은 모호하면서도 친절하나 졸리다는 뜻이다. "유월절의 신비"와 "성례전적인 표지"와 같은 예전용어들은 까마득히 멀리서 들리는 말, 실생활과는 완전히 유리된 말로 들린다. 많은 사람들이 예전적인 주제를 싫어한다는 면에서 "우파적"이다. 왜냐하면, 가톨릭 신앙의 다른 두 국면인 명확한, 양보 없는, 준엄한 신조와 규례들에 비해서 부드럽고 물컹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좌파적"인 입장에 선 다른 사람들도 있다. 이들 역시 예전을 생각하면 부드러운 느낌을 갖는다. 그러나 그들은, 특히 신조와 규례들에 비해서, 예전을 좋아한다. 그들은 에전이 신조와 규례들에 비해서 그들에게 좀 더 "자유"롭고 "창의적인" 여지를 준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공동체로 드리는 예배"와 같은 멋진, 상냥한, 세련된 말들을 한다. 자기들이 그렇다는 말이다.
양쪽 모두 틀렸다. 예배는, 그리스도가 그렇지 않은 한, 부드럽지도 우아하지도 않다. 예배는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 고안한 창조적인 예술이 아니다. 예배는 섬세하고, 순서가 장황하고, 고풍스러운 무엇도, 또는 현실적이고, 현대적인 "적실성"을 시대적으로 손 본(다시 말해서 부적합한 면) 무엇도 아니다. 예배는 우직하다. 에배는 객관적인 실제다. 어떤 무엇이 아니라, 어떤 누군가다. 그 누군가는 예수다. "교회가 예배 안에서 선포하고 기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비이다" (가톨릭교회 교칙 1068). 이점을 이해할 때, "예수충격"이 꿈틀거린다.
그리스도는 예배에서 죽어있지 않고 살아계시다. 그는 우리 믿음과 경건, 우리 추억과 사랑의 단순한 대상이 아니다. 그는 살아 움직이는 주체다. ("조심하라! 그분은 살아계시다!) 그는 성례전들 안에서 우리를 향해서 실제로 일들을 행하신다. (성례전을 명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리스도는 죽은 사람처럼 추념하지 않는다. 그와는 마주친다. 그는 마치 종마처럼 "활기차게 뒷발질한다." "우리밖에 없다고 생각했다가 살아있는 무엇을 만나면 언제나 소름이 돋는다........낚싯줄을 잡은 손이 당겨질 때, 어두움 속에서 무엇인가가 바로 당신 곁에서 숨쉴 때.......우리는 소리친다. '조심해. 살아 있어!'" (C. S. 루이스, 기적, 11장) 이런 일이 교회의 일곱 가지 성례들 모두에서 일어난다.
그분이 하시는 일은 한마디로 구원이다. (교회는 예배 가운데서 무엇보다........우리의 구원에 관한 일을 기념한다." 가톨릭교회 교칙 1067) 성례전들, 무엇보다 미사는 우리를 구원한 사건들을 회상할 뿐 아니라, 그것들을 현실로 만든다. 미사는 그리스도가 실로 거기에 계시도록 할 때 그 사건들을 현실로 만드는 것이다. 그분은 바로 그것을 위해 오셨다. 그분은 오셔서 바로 그 일을 하셨다. 그는 우리를 구원하신다.
미사에 가서 영성체를 받는 것은 우리의 신적인 연인과 밀회를 나누는 일이다. 너무도 모호하고 추상적이고 심드렁하며 물렁하다. 너무나도 따분하고 하품이 나온다. 예수 그리스도는 정말 심드렁하고 푸석하고 물컹하고 따분하다. 그는 유령이 아니다. 그를 만지면, 철과 불을 만지는 것이다. 유령은 바로 당신이다. 그를 만진다는 것은 딱딱해지기로 하는 것이다.
모든 개신교도들이 가톨릭교도가 돼야 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오직 미사에서만이 그들은 훌륭한 개신교도로서 가장 깊고 가장 옳으며 가장 정의로운 염원, 즉 그리스도가 주시는 가장 단단한 음식인 그분 자신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유대인이 크리스천이 되었다. 그는 바른 말을 했다. "나는 더 유대인답게 됐다. 결코 유대인에서 떠난 게 아니다. 나는 이제야 완전한 유대인이 됐다. 나는 율법과 선지자들을 완성했다. 나는 메시아를 발견했다." 어떤 복음주의 개신교도가 가톨릭교인이 됐다. 그는 바른 말을 했다. "나는 복음주의를 완성했다. 나는 복음주의자가 됐다. 결코 복음주의에서 떠난 게 아니다. 나는 복음, 즉 좋은 소식의 중심과 깊이를 발견했다. 나는 교회를 우상화하고, 그리스도에게서 더 멀어지지 않을까 염려했다. 그러나 세상에 다른 어떤 것보다 가톨릭교회가 더 온전하게 그리스도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적임을 발견했다."
그러나 가톨릭교도가 개신교도가 되기 전까지는 개신교도들은 가톨릭교도가 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이 장에서 나는 주로 개신교도들을 상대로 말해왔다. 이제는 가톨릭교도을 상대로 말하려고 한다.
교회가 위기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중요한 모든 측면들에서, 유럽과 북미의 교인 숫자는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사람들의 이름은 세례명부에 올라 있지만, 이름이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고, 예배하고 성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그렇게 되는 것이다. 50년 전, 75퍼센트의 교인들이 미사에 나갔다. 이제는 25퍼센트만이 그렇게 한다. 이게 미국의 실정이다. 서부유럽의 통계는 더 낫다. 고해성사에 참여하는 사람의 숫자는 더 암울하다. 지난 세대의 신학적인 지식은 거의 멸절된 상태다. 현재 대학 졸업자들의 신학 지식은 50년 전 초등학교 5학년 학생들의 그것보다 못하다. 과장이 아니다. 나는 안다. 나는 교수 아닌가. 결코 부풀린 게 아니다. 50명의 가톨릭 대학 학생 중 단 한 명도, 그리스도가 두 본성을 지닌 한 인격이시다, 혹은 삼위일체는 하나님이 한 본성으로 계시되 세 인격 안에 계시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철학적인 논증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이증하려고 하면 대부분은 아연실색을 했다. 최악은 이것이다. 그들에게 죽을 때 왜 하나님이 그들을 천국으로 이끄실 것이라고 기대하느냐는 질문을 했다. 20명 중에 단 한 명만이 그나마 예수 그리스도를 입에 올렸다. (이것은 추정치가 아니다. 수백 가지 설문에 기초를 둔 통계다.) 이것보다 더 나쁜 교육적인 스캔들이 또 있을 수 있는가?
교회의 도덕적인 가르침을 보니 더 한심한 형국이다. 교회가 성에 관해 무엇인가를 했다고 해도, 전혀 가르치지 않았거나, 오해하고 있거나, 아니면 무시하고 있거나 중 하나다. 당혹스러운 점은, 낙태에 관해서는 예외로 치더라도 교회의 가르침이 단지 거부되고 있든지 더 나아가서는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성도덕에 관한 가르침은 인종차별과 비슷하게 다뤄진다. 이런 모습을 보고 가톨릭교도이 되지 않아야 하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지난 40년 동안 나는 어떤 성적인 죄를 죄라고 꾸짖는 설교를 단 한 편도 들어본 적이 없다. 교회는 사회적인 도덕에 대해서만 설교해왔다. 그것도 매우 편향적이었다. (분권원리에 대해서 들어본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분권을 말하면 사회주의자든 보수주의자든 다 싫어한다. 그래서 분권원리 같은 것은 가르쳐지지 않는다.)
신앙 위기의 근원은 무엇인가? 세련되고 요란하며 분주하고 마르다를 연상시키는 그 모든 프로그램들과 활동들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교구들, 성직자들, 평신도들, 설교, 음악, 교칙이 왜 이리 무디고 꿰뚫는 힘이 없는 것으로 느껴지는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지난 50년 동안 서구의 북반구 전체를 통틀어서 회심자의 숫자와 헌신의 강도라는 면에서 왜 복음주의자, 근본주의자, 초교파주의자 그리고 오순절 교회들이 가톨릭교회보다 훨씬 더 성공적이었는가? 왜 온전한 신앙을 가진 가톨릭교도들이 부분적일 뿐인 신앙과 자신의 신앙을 맞바꿔 치고는 했는가? 왜 장엄한 성당을 농가로 바꿨는가?
이것은 통상적인 노골적 이단 혹은 배교가 아니다. 역사, 전통, 교황, 성인, 성례전 등 개신교도들이 결여하고 있는 긍정적이고 차별적인 가톨릭적인 요소들에 대한 불신 혹은 무관심이 아니다. 이런 요소들에 대한 공격은 최초의 선택이 일어난 뒤의 일이이다. 그리고 이런 요소들이 선택의 동기가 되지는 않는다.
볼티모어 교칙 혹은 성 조셉 교칙 등 견고한, 온전한 문서들을 거부하고, 저 바보스럽고, 비할 데 없이 무미건조한 문서검열청의 문헌들을 대중심리학의 상투적인 말들과 관료적인 진부한 말들로 공허하고 모호하게 치장한 벤징거 Benzinger와 새들리어 Sadlier의 문헌으로 바꿔놓은 작태가, 교칙 문제와 관련한 후기 두 번째 바티칸 배교(더 좋은 말이 없을 것이다)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그것들에 대한 그의 반응을 요한계시록 3장 16절에서 놀랍도록 상세하게 밝힌다. 이 구절을 보자. 요한의 서신 전체를 읽고, "라오디게아"를 "유럽과 미국"이라고 바꿔라. 이 둘을 맞대놓고 보도록 하라. 그러면 이 둘이 얼마나 잘 들어맞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재앙이라고 말할 만큼 지루한(너무 따분해서 되레 흥미가 솟을 지경이다. 수십 길 높이로 쌓아올린 진흙더미 같으니까) 교칙들조차 원인은 아니다. 그것은 결과다. 질병이 아니라 증상인 것이다.
자유주의적인 혹은 근대주의적인 신학의 이단사설에서조차도, 초자연성(결코 정직하게 토론되는 법이 없는 주제다. 보통은 그냥 은근슬쩍, 아주 세련되게, 그리고 괴상망측하게 당연시 되곤 한다)의 부인은 첫 번째 그리고 가장 심각한 부정과 부실은 아니다. 왜냐하면 근대주의가 거부한 정통 신학이 첫 번째 그리고 가장 심각한 부정과 부실은 아니기 때문이다. 성 토마스는 신앙의 반대는 교의들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에 대한 것이 우선이라 말했다. 교리 조항들이 아니라 그 조항에 담겨 있는 그 인격에 대한 반대인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위기는 그리스도 부재의 위기다.
양떼들 가운데는, 잘 못 먹어서 생긴 위기도 있다. 그러나 목자들 중에서는, 먹이는 것을 두려워해서 생긴 더 심각한 위기가 있다. 목자라는 말은 교황 그리고 평균적인, 부지런히 사목활동을 하는 경건한 교구 사제들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나는 문서검열청 문헌들을 저작하는 "지성주의자들," 그리고 사목연구소의 수장들, 신학교수들, 그리고 전직 수녀들(전직 수녀들은 결코 믿을 만한 사람들이 못 된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60년대, 70년대 그리고 80년대에 훈련받은 주임사제, 수도원장, 주교(그렇다. 가룟 유다도 주교급이었다)들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 선생들은 정말 가르쳐야 할 신적인 무엇이라도 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스러워한다. 교의, 전통, 신적인 계시, 신적인 법칙, 권위, "주께서 말씀하시길"을 질색한다.
그러나 주는 그리스도이시다. 따라서 위기는 그리스도의 부재가 아니라 그리스도 공포증이다.
왜 그런지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의 처지를 헤아릴 수도 있다. 이들이 식욕 부진증을 보이고 있는 영혼의 음식은 살아있고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고양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호랑이 그리스도"다. 그분에게 가까이 가면 피 냄새가 난다. 그래서 줄행랑을 놓는다. 당신은 타오르는 이글거리는 불길을 본다. 마른 뼈들이 살아나며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시편들과 위대한 옛 개신교도들의 찬송들을 통해 울려 퍼지는 기쁨과 영광과 전쟁의 함성을 듣는다. 그 함성은 예의바르지 않다. 차라리 예수가 대중적인 심리요법가요 교회가 공영방송에 나오는 마음씨 좋은 로저 아저씨였으면 좋을 뻔했다.
어떻게 그 불을 되 붙일 수 있을까? 별다른 방법이 없다. 우리는 그저 (1) 교회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믿어야한다, (2) 경배로써 반응한다. 그러고 나면 필요한 다른 모든 것은 따라온다. "단 하나만이 필요"했던 마리아에게 그랬던 것과 똑같다. 모든 성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전 세계에서 가장 거룩하고 가장 행복한 사람들의 모임인 테레사 수녀의 자선선교회에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말하는 경배는 성례전적인 경배다. 그 침묵 가운데는 핵폭탄 수 백 개보다, 태양보다, 빅뱅보다 더 큰 위력이 나타난다. 그것은 삼위일체라는 원자가 십자가에서 갈라지고 구속하는 피가 터져 나왔을 때 방출된 하나님의 능력이다. 성례전적인 경배에서 우리는 이 권능을 만진다. 그것은 모든 것의 근원이다. 그것은 바로 우주의 지배자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영혼의 촛대를 그분의 열정, 영혼을 향한 그분의 열정이라는 불에 갖다 댄다. 우리에게 그 불꽃이 옮겨 붙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을 위해서 이 일을 해야 한다.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이 일을 해서도 안 된다. 아니 세상의 구원이 가장 소중한 동기가 돼서도 안 된다. 무엇보다 그분이 우리의 동기가 돼야 한다. 그분은 어떤 목적이든 그것의 수단이 아니다. 그분이 목적이시다. 그분은 그분 자신 때문에 경배 받으셔야 한다. 그분의 그분 되심 때문에 경배 받으셔야 하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우리를 위하여가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그분을 경배하라고 명령하신다. 그러나 그분은 그분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이 일을 행하라 하신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그분이 필요하지 그분에게 우리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분의 영광은 우리의 관심사가 돼야 한다. 우리의 영광이 그분의 관심사가 돼야 한다. 사랑이란 게 바로 이런 것이다. 사랑은 거룩한 교환이다.
이 거룩한 교환에 들어갈 때, 영원하신 삼위일체의 생명에 돌입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절대로, 결단코, 맹세코 우리가 그분을 포기하기 전에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6부
일곱 갈래의 후기
1. "예수충격"은 꼭 정서적인 것이 아니다. 몸이 "붕 뜨는" 것이 아니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찾아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잠시 호흡을 멈출 때 찾을 수 있다. 성별의식의 순간, 성만찬을 받는 순간, 당신은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다. 숨을 멈춘다. 시간이 멈춘다. 그가 우리에게 오실 때 시간이 멈춘다. 시간은 그분이 부리는 종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왕의 종들을 왕이 입실하시면 걷지 않고 엎드린다.
예수충격은 정서적이지 않다. 그것은 정서 그 이상이면 이상이지 그 이하는 아니다.
2. 더 섬세하고, 더 깊고, 덜 감정적이며, 더 지속적인 그분의 현존은 최초의 예수충격에 비해서 우리에게 훨씬 더 값지고 더 결정적이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충격이 이끌어내도록 고안된 목적이요 지상과제다. 예수충격은 사랑에 빠지는 것과 같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그러나 목적이 아니다. 결혼이 목적이다.
3. 이 책의 "그리스도 중심주의", 이 책의 "오직 예수" 관점은 다른 모든 중심들, 모든 우상들, 예수에 대한 모든 첨가물들과 추상적인 개념들 그리고 부수물들과 대체물들과 환영들을 대비 對比하고자 설정된 것이다. 이 대비는 다른 두 신적 인격들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 예수가 가지고 있은 모든 요점은 아버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요 4.34, 5.30). 그리고 자기 자신의 그것들이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과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기 위해 오셨다. (요 7.16) 그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요 14.9). 왜냐하면 "나와 내 아버지는 하나"(요 10.30)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또한 성령님을 보내셔서, 그가 우리와 계실 때보다도, 우리와 좀 더 온전하게 함께 하도록, 우리 안에 더 밀착하여 계시도록 하셨다. (요 16.7) 삼위일체에는 어떤 경쟁관계, 어떤 양자택일이 없다. 그리스도 중심주의와 하나님중심주의는 오직 이단들이나 경쟁으로 놓는다.
4. 따라서 "예수충격"은 은사주의적인 기독교, 성령 충만한 기독교, 오순절적인 기독교로 연결된다. 무엇보다 오직 성령께서만 예수충격을 일으키신다. 성령이 오롯하게 그리스도를 위하시듯, 그리스도도 오롯이 성령을 위하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 예수는 세례요한과는 달리 네 복음서 모두에서 물이 아니라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분으로서 소개되고 있다. 물세례는 출발에 불과하다. 물은 살아있는 만물에게 기초적인 음식이 된다. 그러나 성령세례, 불세례가 그 목적이다. 우리는 물에 젖어 시작하지만, 불에 붙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성령님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더 큰 친밀감이 싹 트게 하신다. 성부는 우리 밖에 계시는 하나님이고, 성자는 우리 곁에 계시는 하나님이며,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성령님은 불이다. 교회는 화재현장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불행히도 이 둘이 분리가 돼버렸다. 대부분의 제도화한 기독교는 불이 없는 화재현장이다. 대부분의 오순절 혹은 은사주의적인 기독교는 화재현장이 없는 불이다. 첫 번째는 영혼이 없는 몸이고, 두 번째는 몸이 없는 영혼이다. 둘 다 온전한 인간이 아니다. 둘 다 장성한 그리스도는 아니다.
이 둘이 완벽하게 연합할 때, 교회는 세상을 다시 한 번 이길 수 있다.
5. 그리스도 중심주의는 다름 아닌 모든 다른 중심들을 대치한다. 바로 우상숭배를 대치한다. 배치를 대치한다. 사물의 잘못된 위치 선정을 대치한다. 그것들을 중심에 놓은 배치를 대치한다. 그러나 다른 사물로 대치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그분의 왕국을 먼저 추구한다면, 다른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더해진다. (마 6.33) "오직 예수"는 "예수 대 다른 모든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주이신 예수, 모든 것의 중심이신 예수, 모든 것의 연인이고 고안자고 창조자고 구속자고 영화롭게 하는 자인 예수"라는 뜻이다. 은혜는 자연을 완전의 상태로 이끈다. "오직 예수"에서 "오직"은 보편적이고, 우주적이고, 포괄적인 쌍자합일적인 "오직"이지, 청교도적인, 근본주의자적인, 배타적인 양자택일의 "오직"은 아니다.
"그리스도"는 머리와 몸 전체의 그리스도를 뜻한다. 그의 몸은 우리요 이 세상 전체다. 우리는 우리의 더 큰 몸, 혹은 우리 몸의 외연이라 할 수 있는 이 세상을 인간화한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신으로 만드신다. 우리를 그분의 더 큰 몸의 일부로 만드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를 통해서 전 세계를 그분 몸의 일부로 만드신다. (이 점에 관해서는 데이아르 드 샤르뎅의 신의 환경 The Divine Milieu를 보라. 이 책은 지극히 심오하다. 경박단소를 좋아하고 자유주의적인 가톨릭교도들은 인간의 현상 The Phenomenon of Man이라는 그의 작품을 좋아하지만, 굳건하고, 정통적인, 보수적인 가톨릭교도들, 예를 들어 헨리 드 루박 Henry de Lubac과 프래너리 오코너 Flannery O'Connor같은 이들은 신의 환경을 좋아한다.)
6. 그리스도 중심주의는 이론이나 신학이 아니라 실천이다. 십자가상에서 그리스도께서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물으셨을 때(그의 친구이며 고해자인 레귀날드 수사의 서약 증언에 따르면) 그의 대답에서 이점은 완벽하게 표현된다. "토마스야, 네가 나에 대해서 썩 잘 썼더구나. 그래, 어떤 상을 주랴?" (그분은 우리 모두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신다. "그래, 어떤 상을 주랴?" 이 질문은 요한복음이 기록하는 예수의 첫 질문이기도 하다[1.38]. 성 토마스는 완벽하게 그리스도 중심주의의 답을 했다. "주님, 오직 주님 자신을 주십시오.")
7. 그리스도 중심주의는 그리스도가 모든 문을 여는 황금 열쇠라는 뜻이다. 이 문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에큐메니칼 정신, 교육, 두려움, 권태, 죽음, 해석학, 종말론, 의미론, 가족. 이에도 수많은 문들이 있다. 그렇다. 그리스도는 이 모든 문들을 여는 하나의 마스터 열쇠다. 이 열쇠가 어떻게 문들을 여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책 한 권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