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사철-종사품

Mission as Feeding People

sherwood 2009. 12. 12. 01:32

선교; 사람들을 먹이는 삶과 일(Mission as Feeding People)

 

 

사람을 먹이시는 하나님 야훼

이슬람의 알라, 불교의 석가모니 그리고 힌두교의 브라흐마는 인간의 먹는 일에 관심이 없다. 물론 이 종교들의 경전 일부에서는 신봉자들이 따라야 할 섭생법(dietary)을 말하는 경우가 있고, 사제와 직업적인 수행자들을 위한 특정 섭생법을 따로 두는 경우가 있다.[1] 그러나 신구약 성경의 야훼는 인간의 먹는 일에 초미의 관심을 보인다. 특히 야훼는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해서 중요한 자기계시와 인간구원의 큰 전환기마다에 인간에게 나타나 이것을 먹어라, 혹은 저것을 먹지 말라고 한다. 마치 인간에게 나타내려고 하는 자신의 본성, 그리고 인간과 맺고자 하는 관계의 사활이 먹거리에 달려 있는 양 보이기조차 한다. 우리는 성경을 다섯 파트(모세오경, 역사서와 선지서, 복음서, 서신서 그리고 요한계시록)로 나누고, 매 구획마다 인간을 먹이시는 야훼와, 그 먹이시는 행위가 드러내고자 하는 구원사적인 의미를 추적해볼 것이다. 그리고 인간을 먹이심이 선교하시는 하나님’(missionary God)의 중요한 자기계시이기에, 우리가 이 일의 동참을 늦출 수 없음을 스스로 각성하고 호소할 것이다.

 

아담, 노아 그리고 요셉

야훼가 사람의 먹는 일에 초미의 관심을 보인다는 것은 공교롭게도 성경의 첫 책인 창세기, 그것도 우주, 인간, 역사, 자연의 기원을 말하는 창조기사에서부터 분명히 드러난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땅 위에 있는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있는 열매를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들이 너희의 먹거리가 될 것이다”(1:29). 이 구절이 인간 창조가 막 끝나는 시점에서 선언된 것임을 본다면, 인간에게 먹을 것(더 정확하게는 먹을 수 있는 것, 혹은 먹어야 할 것)을 규정해주는 야훼의 말은 가벼운 삽입이나 주변 장식품이 아니다. 생명나무 혹은 선악과가 나오기도 전에 이미 인간에게는 먹을 수 있는 것, 먹어야 할 것이 있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 야훼는 인간과 첫 대면에서 천상적인 계명, 고상한 이념이나 거창한 사상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채소와 과실을 양식으로 먹으라는 소박한 말씀하셨는가? 성서가 증언하는 하나님 야훼는 물질적인신이다. 그는 영이시나, 물적 요소를 갖도록 지으신 사람이 지닌 물적 차원을 깊이 이해하신다.[2] 야훼께서 갓 창조된 인간에게 천상의 개념이 아니라 먹을 것을 주심은 야훼만이 인간의 창조주이시며, 앞으로도 창조주로서 자신의 언약적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시겠다는 약속이다. 사람을 먹여 살리시는 야훼의 진중하신 사랑, 이것이 창조의 목적이고 모든 역사발전의 추동력이다!

온 우주와 인간을 지으신 야훼가 인간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심은 창세기 9장에서 다시 한 번 입증된다. 숙지하다시피 창세기 9장은 야훼께서 인간의 차고 넘치는 죄악을 물로 심판하고, 다시 한 번 물에서 인간을 비롯하여 온 세계를 끌어내시는 재창조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이 순간에도 야훼는 여전히 인간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신으로 자신을 나타내신다.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이 너희의 먹거리가 될 것이다. 내가 전에 푸른 채소를 너희에게 먹거리로 준 것 같이, 내가 이것들도 다 너희에게 준다”(9.3).

어떤 사람들은 야훼께서 모든 생물을 인간에게 먹거리로 주신 것과 인간의 현격한 수명 단축의 연관성을 찾기도 한다. , 인간이 육식을 하면서부터 인간의 수명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야훼를 뒤에서 찌르는 분(backstabber)으로 본 유치한 시각일 뿐이다. 야훼께서 비단 과일과 채소뿐 아니라 모든 생물을 먹을 거리로 주심은 인간이 이제는 더 고등한 먹을 것에 의해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사건이다. 인간의 죄악과 반역이 점점 깊어지면 질수록, 야훼가 제공하려는 구원(구원은 신적 생명, 즉 야훼를 닮은 삶이다)의 차원도 점점 깊어진다. 야훼는 이제 과일과 채소로는 유지되지 않는 인간의 생명에 주목하시고, 그것을 공급하신다.

창세기의 마지막 부분은 야훼의 확장된 구원행동을 보여준다. 이제 야훼는 한 개인(아담), 한 가정(노아)을 넘어서 전 지구적으로 행동하신다. 야훼는 히브리인 노예 요셉을 당시 세계의 슈퍼파워인 이집트의 총리로 세워, 기근에 죽어가는 세계인들에게 양식을 공급하도록 하신다. 감금 노예였던 요셉이 총리가 됐다는 스토리는 요셉의 입지전적 성공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니라, 요셉을 통하여 온 세계인들을 상대하시는 야훼를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파격적인 대조 장치다. 지극히 이기적인 동기로 살고 이 때문에 위해(危害)를 자초하기까지 했던 요셉은, 이제 온 세계인을 향해 무한히 자기를 내어주시는 야훼를 보여주는 희생[3]의 소도구로 쓰인다.

 

만나 그리고 이스라엘을 위한 섭생법

야훼께서 히브리인들을 민족국가로 뽑아내신 것은 그들이 지닌 장점과 특성 때문이 아니었다( 7.6-9). 야훼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해방하여 자기 자신에게로 이끎으로써 자기와 특별한, 독점적인 관계가 있는 나라(소유, 제사장)로 세워 온 세계를 자기에게로 역시 이끌려는 계획을 보여주신다( 19.3-6). 이러한 목적에 의해서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은혜의 양식인 만나를 먹고( 16.15), 가나안에 입경 후에는 야훼가 지정해주신 정결한 음식들만을 먹음으로써( 11; 14) 자기들과 야훼 하나님과의 각별한 관계를 가시화하는 책임을 수행해야 했다. 우리는 여기서 만나 그리고 레위기와 신명기 법전들에 나오는 섭생법의 의미를 새겨보아야 한다.

만나는 사실 연원을 알 수 없는 음식이다. 에덴의 아담에게 과일과 채소가 처음 보는 음식, 즉 스스로 경작한 것이 아니라 이미 거기 있던 음식이었듯이 갓 태어난 민족국가 이스라엘에게 만나는 하나님이 마련하여 주신 초월의 음식이다[4]. 만나는 또한 만나는 평등한 음식이었다.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신앙공동체의 일원이라면 모두 이 음식을 먹음으로써 이 공동체를 유지, 구성하는 원리가 상호동등에 있음을 알게 하는 음식이었다.[5] 셋째로 제한을 알게 하는 음식이다. 그날그날 얻어야 했고 날을 넘기면 다 썩는 것이었다( 16.20). 마지막으로 만나는 한시적인 음식이었다. 가나안 접경을 통과한 이후( 16.35)에는 더 고등한 음식, 인간의 본성에 더 온전한 만족을 주는 음식이 준비될 것이다.

광야 이스라엘에게 부과된 섭생법의 구원사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 이스라엘은 먹을 수 있는 것, 그리고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의 구별을 통해서 일상의 거룩을 배워야 했다. 이스라엘은 야훼의 신적 거룩에 초대된 겨레( 11.45)였다. 이들은 일상에서 특별한 섭생의 도리를 따름으로써 자기들을 부르신 야훼가 누구이며 왜 야훼의 말을 들어야 하며, 야훼가 무엇을 뜻하는 분이신지를 알아야 했다. 둘째, 섭생법에 나오는 모든 음식들은 그 음식 자체가 해로운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이 그 사회에서 갖는 사회경제적인 의미 때문에 야훼께서 금지하신 것도 있다. 한 예가 돼지고기인데, 돼지는 온도가 높고 습도가 적은 근동지역에서는 사육하기 몹시 힘든 짐승이므로 자연 돼지고기는 일부 특권층이나 맛볼 수 있는 음식으로 여겨졌다( 65.4 참조). 또한 근동의 기후 때문에 돼지고기가 금방 상할 염려가 있어 먹기에 적합한 음식이 아니었던 것이다.[6] 야훼는 특권층이나 먹을 수 있는 이국적인 음식, 재료의 취득과 조리가 어려운 별난 음식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가장 쉽게 조달하여 먹을 수 있는 식재료들을 정결한 음식으로 먹게 하셨다. 

 

다윗과 엘리야

다윗은 빵의 사람(a man of bread)라 할 만큼 생애 중요한 순간들에 빵과 함께 등장한다. 그는 빵을 가지고 엘라 골짜기에서 블레셋과 대치 중인 형들을 찾아갔다(삼상 17.17). 그가 돔의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야훼의 제사장들만이 먹을 수 있는 거룩한 빵을 달라서 일행과 먹은 사건(21.6)은 신약에서 예수께서 언급하실 만큼 의미심장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6.3).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다윗의 분노를 막아 참살(慘殺)을 면한 것은, 그의 겸손한 태도 때문이기도 했지만, 다윗에게 진상한 200 덩이의 떡도 한몫 했다(삼상 25.18). 다윗은 아말렉 전투를 앞두고 이집트 소년에게 빵과 물을 주어 살린다(30.12). 소년은 다윗에게 보은이라도 하듯이, 다윗 원수들의 적정(敵情)을 자세히 알려주어 대승을 거두게 한다(삼하 6.19), 다윗을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하는 내전에서 백성들은 다윗의 군대에게로 빵을 가져온다(대상 12.40). 이스라엘 백성은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자 번제를 드렸고, 예배가 끝난 후 다윗은 백성들에게 빵을 선물로 준다(삼하 16.1, 대상 16.3).

다윗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서 누군가에게 빵(생명)을 주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그를 통해 정의와 공평으로 온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기름부은 자(메시아)가 약속된 것(삼하 7.8-16)이 확실하다면, 메시아의 한 예표(type)인 다윗이 빵과 함께 이스라엘에 나타나고(앨라 전투는 그의 데뷔 전이었다) 빵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과 더불어 야훼를 예배하는 자로 묘사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다윗이 사람들에게 빵을 준 사람이라면, 엘리야는 빵을 얻어먹은 사람이다. 그는 까마귀(왕상 17.6), 이방인 과부(12) 그리고 나중에는 천사(19.6)[7]에게까지 빵을 받아먹는다. 공급자 모두 하나님의 선지자인 엘리야에게 빵을 주기엔 적절치 않은 상대들이다. 성경 어디에도 이 사건 외엔 동물이 사람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 주는 적이 없다.[8] 엘리야는 (1) 야훼의 선지자로서 이방인에게 빌붙어서는 안 됐고, (2) 그가 과부였다는 점에서 더 삼갔어야 했으며, (3) 과부가 아사 직전의 비참한 빈곤에 처해 있음을 알았기에 더더욱 과부에게 빵을 요구해서는 안 됐다. 그리고 아마도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천사가 사람의 식사를 시중 든 일은 이곳, 그리고 예수의 시험 후 천사들의 시종( 4.11) 외에는 없는 것 같다. 왜 야훼께서는 이런 공급자들을 통해서 자신의 선지자 엘리야를 먹이셨을까? 이런 일들을 통해서 엘리야는 야훼를 어떤 분으로 깨닫게 되었을까? 이 사건들은 구원하시는 야훼의 어떤 면을 알게 하는가?

첫째, 야훼께서는 자기 사람을 도치되고 모순된 상황에 그대로 노출되게 하심으로써, 인간과 역사를 바라보며 뒤집어지는 자신의 속마음을 우리에게 드러내신다. 야훼의 사람 엘리야가 날짐승, 이방 과부 그리고 천사에게 빵을 얻어 먹어선 안 되는 것처럼, 아니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소유인 이스라엘은 바알의 빵부스러기를 주어먹어선 안 됐다. 둘째, 야훼를 위한 선봉에 서 있지만 엘리야는 항상 얻어먹는다. 그러나 아합의 궁내대신으로 일하면서 그 신앙적인 정체성마저 모호하게 보이는 오바댜는 오히려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착실하게 먹인다(왕상 18.4). 우리의 상식과 선입견을 깨고, 오바댜는 먹이는 사람(feeder), 엘리야는 얻어먹는 사람(beggar)으로 그 위치가 바뀐다. 그렇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북한에서, 상파울로와 마닐라 시티의 빈민촌과 미얀마 카렌족 난민촌에서 썩은 물을 마시고 곰팡이 난 빵 한 조각으로 하루를 연명하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야훼의 말씀이 떨어진 기근”( 8.11)을 웅변하고 있는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들은 굶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바알인 물신(物神)내가 너무 사랑스러워’(I love myself and the way I am)의 여신이 던져준 빵 부스러기를 미친 듯이 주어먹고 있는 우리에게, 참 양식은 야훼를 알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 금식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뉴욕, 로스엔젤레스, 서울, 런던, 파리, 시드니, 도쿄라는 메트로폴리탄 도시에서 너무 많이 먹어 찐 살을 되빼기 위해 고급스러운 피트니스에서 트레드밀 위를 달리고 있는 유족한 사람들이 아니라, 두 달에 한 번 5달러 선교헌금을 들고 나타나는 가난한 과부[9]와 이런 종류의 삶을 묵묵히 살아가는 아합 궁의 오바댜들이 야훼가 가슴 아파 바라보시는 사람들을 숨기고 먹이고 있는지 모른다.

 

예수: 하늘에서 내려온 진짜 빵

예수는 자신이 소개하고, 자신의 인격과 삶 특별히 십자가를 지는 죽음 안에서 도래할 하나님의 통치(하늘나라, 천국)를 주저없이 잔치로 표시했다. 예수는 술주정뱅이흥청망청 잔치를 좋아하는 자.’ 그리고 죄인들과 세리들의 친구라는 별명을 얻었다( 7.34). 심지어 예수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이스라엘 앞에 데뷔시킨 세례요한도, 예수가 가져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너무 너그럽고 지나치게 활달하기만 한 것이 아닌가 근심하고 시험에 들 정도였다(7.20). 그러나 예수는 개의치 않았다. 하늘에서 내려온 신령한 빵, 신적인 생명을 주는 새로운 만나, 그리고 찰나적이고 일시적인 해갈을 주는 물이 아니라 믿는 이 안에서 영원히 솟아나는 광천수인 그 자신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예수 역시 이런 깊은 영적 교훈을 에 얽힌 세 가지 중요한 사건으로 시위하고 있다.

 

광야 시험

주지하듯이 광야의 시험은 예수의 하나님 아들됨(sonship)에 관한 것이었다. 세례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대리인, 상속자, 계시자)[10]로서 공식 취임(inauguration)한 예수는, 그가 과연 어떤 아들인지를 시험 받는다. 그 첫 시험은 공교롭게도 에 관한 것이었다. 예수는 광야에 있었고, 40일 주야를 굶주렸다고 한다. 사탄은 굶주린 예수에게 나타나, 하나님적인 능력을 발휘, 돌을 빵으로 바꿔 스스로 배를 불리라고 시험한다. 그러나 예수는 이 시험을 단호히 거절한다. 예수는 신명기의 말씀( 8.3)을 거절의 근거로 삼으심으로써 우리에게 이런 점들을 일깨우신다. (1) 인간의 생명은 빵으로만 유지되지 않는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알고 행하는 데 달려 있다. (2) 하나님의 아들의 권능은 돌을 빵으로 바꿔 자기 배를 불리는 것이 아니라, 주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의 능력을 아버지의 뜻과 독립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데 있다. (3)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온 것은 자기 뜻을 행하기 위함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인류를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로 먹임)에 있다.[11] 예수는 자신의 주림(고난과 죽음)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빵을 줄 자신의 운명과 신분을 이 시험 안에서 확증한다.[12]

 

오병이어

예수는 자기를 따르던 백성들이 광야에서 굶주리게 된 모습을 본다. 한눈에도 광야 이스라엘과 그들의 만나 먹음을 연상시킨다.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은연중 비추고 있는 예수는 이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 그는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제자들이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렇게 했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예수)에게서 참 생명을 주는 빵을 찾으라는 초대였다. 예수는 돌로 떡을 만들라는 사탄의 제안은 거절했지만, 이번에는 빵 다섯 덩이로 5천 명을 먹이신다.

사람들은 예수를 빵을 부풀릴 수 있는 능력으로 여겨 그를 왕 삼으려고 한다. 그러나 예수는 수단이나 매체가 아니라 목적이기에 이를 거절한다.[13] 그는 만나를 먹고도 타락한 본성을 어쩌지 못해 광야에서 멸절된 옛 이스라엘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서 새 이스라엘을 창조하여 하나님께 바치시는 의식으로서 이 기적을 베푸신다. 그의 벳세다 오병이어 사건은, 이런 면에서, 사람들의 배를 채운 사건이 아니라 마음을 채워준 성례전적인 사건이다.[14] 그를 하늘에서 내려온 떡으로 알고 받아먹는 자가 새로운 이스라엘이다.

 

마지막 만찬

예수는 하나님 백성의 죄와 허물을 치워버리고 그들을 다시 한 번 한 겨레와 나라로 모아 하나님 앞에 바치는 인자’( 7)로서, 이 일을 이루기 위해 야훼의 고난 받는 종’( 53)으로서 한 결정적인 사건을 일으킨다. 그것은 곧 십자가 죽음이다. 예수는 자신의 십자가 죽음이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꺼내오실 때 야훼가 제정하신 유월절의 원형적 완성이 되게 하기 위해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드신다. 이때 그는 자신을 새로운 이스라엘이 먹고 영생[15]을 얻어야 할 새로운 양식/음료로 비유하면서 내 몸이니 먹어라내 피니 마셔라”( 26.26-28)고 하셨다.

분명히 노아언약 그리고 모세법전들에서는 피 채 먹는 것이 금지됐다. 그런데 예수는 지금 자신의 피를 마시라고 하고 있다. 무슨 뜻인가? 피에 담긴 생명’( 19.26)을 취하는 일이 바로 자신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생명을 주는 음식에 관한 가장 중요한 금기가 풀렸다. 비유적으로 말해서, 이제부터는 피를 마셔도 된다. 생명의 본질이 예수 안에서 인간에게 열렸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더 이상 포도나무에서 난 것에 연연하지 않아도 된다. 바울의 말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 14.17)기 때문이다. 성령 안에서 정의로운 삶, 기쁨으로 점철하는 삶, 그리고 평화를 만들어내는 삶, 즉 영생이 열렸다!

 

잔치하는 교회

예수가 자기 죽음으로 가져온 종말의 생명을 받은 자들은, 그들의 공동체적 특징을 역시 먹는 것(“떡을 떼고,” . 2.42, 46; 20.7)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루살렘 교회는 승귀(乘貴)하신 주께서 그들 가운데 가시적으로 임재하여 계심[16]을 나타내는 수단으로서 식탁교제(table fellowship)를 계속 해갔다. 성만찬의 원형이라 볼 수 있는 이 공동식사를 특징 짓는 중요한 요소의 하나는 기쁨이었다. 고린도전서는 신자들의 공동식사가 아가페 잔치(agape feast) 혹은 사랑의 잔치(love feast)라고 부르며 이어갔다. 바울은 이 식사를 통해 신자들이 주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특권을 향유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전례 없이 준엄한 경고로 이 식사의 목적을 바르게 인식하고 참여할 것을 촉구한다(고전 10.1 이후[17]). 우리는 벧후 2.13 그리고 유다서 12절 같은 곳에서도 아가페 식사의 모습을 발견한다.

1세기 교회의 공동식사가 성만찬이었는지 애찬이었는지를 신학적으로 분별하는 것은 이 소논문의 목적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여기서 이 식탁교제가 가지고 있던 사회학적인 의미를 추출해볼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이 식사는 예수 죽음/부활 이후에 새롭게 창조된 하나님의 사회(교회)가 그때까지 역사에 엄존해오던 상당히 중요한 차별들- 구원사적인, 인류학적인, 그리고 사회신분적인-을 예수 안에서 극복했음을 보여주는 전대미문의 대사건이다. 이 식사는 갈 2.28의 선언, “”의 실제화(actualization)였다. 유대인-이방인(구원사), 남자-여자(인류학), 자유인-노예(신분)의 구별이 철폐되었음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애찬(성만찬)이다.

만약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먹다가 유대인들을 보고 움츠렸다는 그 사건( 2.12)이 바로 이 아가페 잔치를 가리킨다면, 이 일은 21세기의 신자인 우리에게도 크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21세기의 우리에게는 무엇이 온 인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무한히 먹도록 초대하고 계시는 야훼의 파티와 뱅큇에 더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것일까? 예수가 자기 죽음으로 허문 모든 차별의 장벽을 우리는 무슨 명목과 이유로 다시 세우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어떤 벽들을 치고 있는 것인가?

 

문 두드리는 예수, 그리고 그가 주는 생수

우주와 역사의 목적이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신 자 예수( 5.5)로 인해 완성되는 대역사를 보여주는 대작 회화(繪畵) 요한계시록은 알파와 오메가, 죽임 당했던 예수를 다시 한 번 잔치를 좋아하는 분, 그리고 목 마른 자들에게 생명수를 나눠주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3.20). 인간을 창조하신 후 고매한 천상의 법칙이 아니라 먹거리를 지정해주시는 창세기의 야훼를 연상시키듯, 존귀케 되신 그리스도는 이 땅에 존재하는 자신의 몸 교회를 향해서 신비하기 짝이 없는 영지(靈知)가 아니라 다시 한 번 먹는 일을 통해서 자신의 주재권(Lordship)을 천명하신다. 무엇이 신자의 삶인가? 모든 식사를 성만찬으로 바꾸는 예수의 현존 가운데 사는 삶이다. 무엇이 예수의 주 되심인가? 그가 우리의 모든 식탁에 오셔서 함께 해주시는 예수와 함께/예수 안에서 사는 삶이다.

"다 이루었다. 나는 알파며 오메가, 곧 처음이며 마지막이다. 목마른 사람에게는 내가 생명수 샘물을 거저 마시게 하겠다”(21.6). 역사의 목적이 다 이루어졌다. 지구는 물에서 꺼낸 행성이다(“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1.2). 인간 역시 물(어머니의 양수)에서 나온 존재다. 따라서 인간은 젖도 포도주도 마셔야 하지만 무엇보다 물을 마셔야 산다. 이런 인간을 향해, 지상에 계실 때 일부 유대인들을 향해 선포한 물의 초대[18]가 이제는 온 우주적 권세를 지닌 대권자의 권한으로 온 인류를 향해 무제한적으로, 값없이 선포된다. 이 선포를 듣고 응답하는 자에게 오늘구원의 때요 은혜의 시기”(고후 6.2).

 

세계의 1/3은 굶고 있다

“120억의 인구가 먹고도 남을 만큼의 식량이 생산되고 있다는데 왜 하루에 10만 명이, 5초에 한 명의 어린이가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는가?”[19] 8 5천만 명이 굶기를 일상처럼 하는 이 현실에서, 인간들에게 구원역사의 매 중요한 순간마다 더 나은 음식, 즉 채소와 과일, 육고기, 나아가 자신의 살과 피, 그리고 생명수를 기쁘게 내어주신 야훼를 믿는다는 백성들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혹시 우리는 기근이 지구의 과잉인구를 조절하는 작용[20]을 한다고 믿는 많은 지식인이나 정치가, 국제기구 책임자들처럼 전세계 1/6 인구가 당하고 있는 이 고난에 라는 레이블 한 장을 붙여놓고 슬쩍 넘어가고 있지 않은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도덕적, 지적으로 이미 심각한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고, 나아가서 야훼를 심히 욕 되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21세기에 겪고 있는 기아의 문제는 모자라는 식량의 문제가 아니라, 식량분배를 둘러싼 사회구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식량 자체는 풍부하게 있는데도,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확보할 경제적 수단이 없[21]다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죄 때문에 돋아난 가시와 엉겅퀴가 아니라, 앙드레 S.A. (스위스), 컨티넨털 그레인(미국), 카길 인터내셔널(미국), 루이 드레퓌스(프랑스)와 같은 세계적인 곡물상들의 덤핑-품귀농간 때문에도 빚어지는 인재”(人災)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비행기로 식량을 공중낙하 시키라고 국제원조기구에 압력을 넣어야 하는가? 기아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원인과 상태를 모르고 뿌린 곡식이 오히려 사람들을 더 빨리 죽게 할 수 있는데도? 아니면 만성적인 자금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국제식량기구(FAO), 세계식량계획(WFP) 본부 앞에서 피켓시위를 해야 할까? 캘리포니아 주의 육우농장인 ‘Feed Lot’의 절반 정도가 한 해 소비하는 옥수수의 양이, 옥수수를 주식으로 하면서도 만성적 기아에 허덕이는 잠비아 같은 나라의 연간 필요량보다 더 많고[22], 아프리카와 남미, 아시아 일부 국가 사람들은 기아에 시달리지만 서구인들에게 더 많은 육우를 공급하기 위해 소들은 세계 곡물의 25퍼센트를 먹고 있는 이 현실에서 과연 할 짓일까?

 

복음주의자들의 딜레마

우리는 확실히 비정상적인 시대에 살고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돈을 기부하지만 구호조치는 점점 더 무색해지고 있다. 어떤 구호조직들은 행정력 강화를 내세워 점점 더 관료조직화 하고 있다. 대도시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이 부촌에서 나온 쓰레기로 연명하고 있다. 사막화와 산림파괴의 영향으로 가장 피해(; 한국의 황사현상)를 보는 사람들은 역시 의료혜택의 사각지대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이다. 금융의 과두(寡頭)지배로 말미암아 불평등은 돌이킬 수 없이 심화하고 있다. “나면서부터 십자가에 못 박힌 아이들[23]이 있다. 태어났지만 탈수증, 설사, 영양분이 충분치 않은 산모의 젖 등으로 수 일 내에 죽어 교회묘지 옆에 묻히는 수많은 영유아들을 뜻한다. 이 아기들의 부모는 너무 가난해 불과 몇 십 센트의 돈을 낼 수 없어 아이들의 출생신고를 하지 못하고, 그래서 아이들의 작고 초라한 봉분에는 어떤 표식도 없다.  

이런 참혹한 보고를 들을 때마다 나 같은보수주의적인 복음주의자는 애써 마음속으로 낮게 중얼거린다. “그래도 사람의 영혼을 거듭나게 하는 복음전파가 우선이지! 학교나 병원이 교회만큼 영혼을 위해 효과가 있겠어? 구호양식 먹고 죄 짓고 살다가 죽으면 지옥인데……” 만약 John StottChristian Mission in the Modern World: What the Church Should Be Doing Now!을 읽지 않았다면 나는 이 고민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저런 근본주의적 구호들 뒤에 숨어서 내 욕망을 정당화하고 양심의 가책을 무마하며 지냈을 것이다.

Stott의 말처럼 사회적인 행동은 복음전도의 수단(means)이 되거나, 복음전도의 표출(manifestation)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위험이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자칫 무엇인가를 씌우지 않으면 (마치 쓴 약의 당의[糖衣] 캡슐처럼) 복음 그 자체가 사람들에게 도무지 다가갈 수 없는 것인 양 복음을 전락시키고, 또한 우리의 박애주의적인 동기 자체를 손상시킬 수 있다. 아니, 자칫 ‘Rice Christians’을 만들 수 있다.[24] 선한 행동이 복음전도의 표출이 될 수 있지만, 여전히 어떤 목적의 하부적인 수단이라는 의심을 피할 길이 없다. 우리는 여기서 Stott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 “……선한 행동이 가시적인 사랑의 형태라면, 선한 행동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6.35).”[25]

Stott는 위의 두 접근이 주는 오해를 피하면서도 복음전도사회적 행동이 둘 중 어느 하나도 손상시키지 않고 행할 수 있는 새로운 시각을 열어 주었다. “사회적 행동이 복음전도의 파트너가 되는 방식이다. “이 둘은 파트너로서 서로에게 속하지만, 서로가 독립적이다. 이 둘 각자는 서로의 옆에 자기 자신의 발로 나란히 선다. 어느 한 쪽도 다른 쪽의 수단이 아니다. 아니 서로를 향한 표출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 둘 서로는 그 자체가 하나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 둘 모두는 속이지 않는 사랑의 표현이다.”[26]

 

풍요의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

Ronald Sider는 이제 고전이 된 저서 Rich Christians in an Age of Hunger (Word Publishing, 1990)에서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전세계적인 기아가 구조화한 악임을 지적한다.[27] 그러나 그는 부자들을 무턱대고 비난하거나, 헤어나오지 못할 죄책감의 구렁텅이에 우리를 빠뜨리지 않으면서도 문제의 해결을 향해 나아가는 길을 제시한다.

첫째, 우리는 단순한 생활(simplicity)을 실천해야 한다. 수입에 따라 십일조를 더 늘리는 방안, 제한된 의미에서의 공동생활, 유휴 재산, 시간, 재능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실천, 필요와 사치 그리고 건전한 취미활동과 신분과시 기재로서의 여가활동 구분, 과도한 품위 유지 비용 삭감 등등으로 우리는 더 단순하게 살 수 있고, 여기서 나오는 재화와 시간을 다른 이들을 위해 투자할 수 있다.[28] 아울러 교회도 거품을 빼야 한다. 건물 의존도를 줄이고 가정 등에서 모일 수 있는 방안들을 적극적으로 연구, 실천해야 한다.[29]기아시대에 유리로 된 성전은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

둘째, 그러나 우리는 개인과 교회의 변화에만 만족해서는 안 된다. 사이더는 외교, 공정한 무역, 부채, 지구보존, 성장과 자원배급, 해외원조 등에도 개인의 회심에 준하는 절박하고 대대적인 가치의 전복이 있어야 함을 한 대학교수(Robert Frykenberg)의 말을 인용해서 호소하고 있다. “원조, 과학, 그리고/혹은 기술 등 어느 것 하나도 현상황을 돌려놓을 수 없다. 더 근본적인 각성혹은 회심이 상당 수 사람들에게서 의미심장하게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혁명적인 성품의 변화가 요구된다. 이런 변화는 오로지 개인의 가슴과 마음에서 시작될 수 있다.”[30]

사이더는 그의 책을 한 기독교기관인 Bread for the World (BFW, http://www.bread.org/)를 소개하면서 마치고 있다. 이들은 비영리단체로서 미국 전역에 흩어져 활동한다. 이들의 주요 활동은 전 세계의 가난하고 굶주리는 이들에 대한 미정부 정책의 변화를 유도하는 것이다. 이들은 전 세계적인 기아대책에 미국정부가 발벗고 나서도록 하는 기아와 전지구적인 안전 헌장”(the Hunger and Global Security bill”이 통과되도록 큰 역할을 했다. “생색이나 내는 자선 혹은 임시변통의 정치놀음에 잡힌 흉내가 아니라, 기아와 빈곤을 정복하기 위한 굵직한 전 세계적인 노력[31]을 경주하도록 미국 교회들을 오늘도 일깨우고 있다.

 

정당한 분노로서의 선교

Stott 18세기 영국과 미국에서 일어난 복음주의 부흥운동의 효과가 비단 복음전파와 죄인들의 회심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고 일침을 박는다. 이 운동은 박애주의를 확산하고 대서양 양안에 접한 두 나라들의 사회에 심원한 영향을 미쳤다.”[32] 아울러 그는 존 웨슬리가 전한 복음이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회적인 명분들을 택하게했고, 이로 인해 영국은 프랑스와 같이 피비린내 나는 혁명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말하는[33] 역사학자들이 있을 정도라고 주장한다. 아니, Stott사회적인 책임복음전도의 파트터십의 근본을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 4.23; 9.35)신 예수, 그리고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 10.38)신 예수에게서 찾는다.

John Swinton악의 문제는 그것을 개념화하는 특정한 틀에 의해서 규정되고, 어느 정도는 결정되기도 한다[34]고 말하면서, 악의 문제를 순이론적으로만 접근하지 말고, 실천과 인간 경험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그는 우리가 실천적인 신정론자”(practical theodicist)가 돼야 한다고 하면서, 실천적인 신정론자가 할 일로서 가난한/고난 받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고, 나그네들과 함께 하는 우정을 통해 악에 저항하는 일을 내세웠다. 그리고 침묵의 소리를 듣고, 애통하고, 용서하고, 사려 깊게 생각하며 자선을 베푸는[35] 공동체를 신정론을 실천하는 공동체라고 했다.

 

생명의 빵을 분배하는 삶과 일(선교)을 위한 제안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먹임으로써 악에 정당하게 분노할 수 있다. 세계적 기아와 그 배면의 국제적인 투기세력, 아니 더 양질의 고기를 먹겠다고 초지를 불태워 목장을 만드는 우리의 이기적인 탐욕이라는 악의 면전에서 단순한 삶이웃에 냉담한 교회구조그리고 나아가 사회적 구조변화의 시도라는 신실함을 실천함으로써 소극적으로는 악에 저항하고 적극적으로는 신정론(theodicy)을 확립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굶주린 자들을 복음전도와 선행이라는 두 팔로 감싸 안는 삶을 결단함으로써, 우리 인간에게 가장 좋은 먹거리(야훼 자신의 의와 사랑)를 주신 하나님의 본성 저 깊이에서 울려 나오는 선교에 참여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 두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땅밟기, “예수행진등과 같은 미신적이고 모험주의적이며 자칫 제국주의 힘의 행사로 보일 수 있는[36] 비성서적/소모적 선교놀음을 당장 그치고 가이사를 직접 만나 복음으로 그를 얻든지, 아니면 로마제국 내에서 복음전파의 자유를 확보하든지둘 중 하나를 하려 했던 바울처럼 가이사를 얻으려는 노력을 하든지 아니면 가이사급 인물들을 키워내든지[37] 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기아와 식량문제를 다루는 국제기구에 하루속히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파송해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한창 공부해야 할 학생들을 훈련이랍시고 선교지에 내보내 학업과 정당한 인성의 훈련 기회를 놓치게 할 수 있는 비상식적인 행태들을 더 이상 반복해서는 안 될 것이다.

둘째, Steven L. RundleTom Steffen이 말한 Great Commission Company[38]들을 세우는 일에 좀 더 적극적이어야 한다. GCC, 인간의 삶에서 너무나도 중요한 모든 노동과 교역의 영역에서 성서적이고 창의적으로, 대안적이며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방법으로 비즈니스를 수행함으로써 이러한 활동 자체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는 선교적 발상을 말한다. GCC는 단지 비자 획득을 위한 수단, 과도하게 헌신하고 있는 교회들을 고려한 우회전략[39]으로서 텐트메이킹 정도가 아니다. 우리가 생애의 1/3 이상을 보내는 직장/일터/노동의 전 영역에 하나님의 샬롬을 가져오려는 성서적인 세계관 운동이고, 공정하고 균형 있는 무()역을 통해 야훼의 정의(tseh'-dek)를 전지구적으로 전파하려는 노력이다. 기독교와 일반사회를 막론하고 온갖 재정적인 투명성 실패와 추문으로 가득한 이 시대에서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 신뢰성을 더하는[40] 방법으로서 GCC는 의미심장하다. 이런 창발적인 방법을 통해서 사람들을 먹이는 삶과 일로서 선교는 더욱 확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찢어진 몸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저런 악독들[전쟁, 고문, 난민]

고난 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심을 우리에게 알리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과 연대하고 그들 가운데 실제로 계시다.

하나님은 단지 그들을 동정하거나 인간 존재들을 저 밖에서보지 않으신다.

아니, 하나님은 세계의 고난에 깊이 관여하신다.

그분 자신도 피할 수 없는 깊은 고난이 가해질 정도로 관여하신다.”[41]

 


 

참고도서

 

성경

표준새번역 개정판, 대한성서공회, 2004

 

사전

D. R. W. Wood, ed., New Bible Dictionary, [3rd edition], IVP, 1996

Keith Crim (ed.), The Perennial Dictionary World Religions, Abingdon, 1981

 

한국 저서

김세윤, (소책자) 가이사를 얻으라; 바울이 청년들에게 선포하는 한 선교전략, 노잉힘, 2007

______, 요한복음강해, 두란노서원, 2007

지글러 저, 유영미 역,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갈라파고스, 2000

최창모, 금기의 수수께끼: 성서 속의 금기와 인간의 지혜[호모사피엔스 2] , 한길사, 2003

 

영서

John Stott, Christian Mission in the Modern World , IVP, 1975

__________, Human Rights and Human Wrongs: Major Issues for a New Century, Baker, 1999

John Swinton, Raging with Compassion, Eerdmans, 2007

Ronald Sider, Rich Christians in an Age of Hunger, Word, 1990

Stan Guthrie, Missions in the Third Millennium: 21 Key Trends for the 21st Century, (Revised and Expanded) , Paternoster, 2000

Steve Rundle and Tom Steffen, Building a Great Commission Company, IVP, 2003

Volkmar Fritz, 1&2 Kings (Continental Commentaries Old Testament), Fortress Press, 2003

 

 

 


 



[1] 대표적으로 이슬람의 금지 음식 규정인 하랄(halal)과 포도주 및 취기가 돌게 하는 음료를 금지하는 하디스(hadith)를 들 수 있다. 또한 라마단 금식도 일종의 섭생법으로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불교에서 승려들과 신실한 수행자들에게 육류 및 자양강장제로 쓰일 수 있는 오신채(마늘, 부추, , 달래, 흥거[인도에서 나는 향신료]의 일종)를 금하는 것도 일종의 섭생법 규정이다. Keith Crim (ed.), The Perennial Dictionary World Religions (Abingdon, 1981), p. 260.

[2] John Stott, 24ⅹ7 City (John Stott의 마태복음 5: 1-16에 관한 설교, 6 20 2004), All Souls Church (Langham Place, 2 All Souls Place, London, W1B 3DA. +44 (0)20 7580 3522)홈페이지 Resources - Sermons에서 청취, 청취일, 11 7 2009, http://www.allsouls.org/ascm/allsouls/static/sermons/playlists.flow. 스토트는 기독교가 물적이라는 강력한 증거로서 성육신’(incarnation)부활’(resurrection)을 내세운다. 그러나 그는 이 설교에서 물적인’(material)물질주의적인’(materialistic)을 강력하게 대비하고, 현대 기독교인들의 물질주의(materialism) 경도를 심각하게 경계, 염려한다.

[3] 이전 같았으면 복수의 결기에 날뛰었어야 할 요셉은, 자신과 야곱의 아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적인 목적을 깨달은 후부터 사사로운 은원(恩怨)을 뒤로 물리고, 형제들을 하나님의 목적 앞에 정결케 하는 시험을 주관하고(은잔의 시험으로 대표되는), 결국 그들 모두를 한 상에 연령을 따라 질서 있게 앉히는(43.33) 조정자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다.

[4] 실제로 만나는 만후라는 히브리어에서 파생했다. ‘만후이것이 무엇이냐?’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의 이 궁금증과 놀라움에서 우리는 이 음식의 이질성(otherliness),   다른 세계에서 온 것임을 짐작한다.

[5] 만나는 백성 모두가 먹는 음식이기도 했지만, 그 수확 과정 또한 평등했다. 많이 거두나 적게 거두나 백성 모두의 형편에 알맞게 넉넉했다( 16.17, 18).

[6] 최창모, 금기의 수수께끼, (한길사 2003.), p. 67

[7] 표준새번역성경은 뜨겁게 달군 돌에다가 구워 낸 과자,” 개역개정은 숯불에 구운 떡이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모두 빵의 한 종류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8]까마귀는 시체를 먹는 날짐승으로 알려졌고 매우 공격적이다(Volkmar Fritz, 1&2 Kings, Continental Commentaries Old Testament; Fortress Press, 2003), p. 183.

[9] Charles Ven Engen 교수의 “Biblical Foundation for Mission” (Fall, 2009, Intensive Format), 세 번째 강의 시간에 청취한 실화임

[10] 유대인들과 유대신학에서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대행하여 가솔을 이끌고 가업을 성취하는 대행자며 상속인이다. 또한 유대인에게 아들이란 동일한 속성을 지닌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어야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볼 수 있고, 이 봄을 통해서 구원이 일어난다는 것이 유대신학 계시관의 근본이다.

[11] 예수가 후에 보리빵 다섯 덩어리로 5천 명을 먹인 사건으로 보아, 빵의 필요, 빵의 증식(돌로 빵을 만들건 빵으로 빵을 불리건 간에)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12] 아담은 삶에 가장 이상적인 에덴에서 쓰러졌지만, 예수는 삶의 가능성이 끊어진 장소와 조건(40주야의 금식)에서 순종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이 시험에서의 승리가 강한 자를 결박’( 3.27 )했다 선언하는 예수의 확신 배경에 자리잡고 있다 본다.

[13] 아무리 기적, 영광, 위엄 등의 이름으로 부른다 할지라도,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수단인 예수는 하나님일 수 없다. 보스턴대학 철학과 교수 Peter Kreeft 는 저서 “Jesus Shock”(St. Augustines Press, 2008)에서 예수를 삶의 닫힌 문들을 열어주는 열쇠에 비견하는 예화 자체가 비성서적이라고 했다. ? 열쇠는 문을 열고나면 사실 무용지물이니까!(p. 15)

[14] A. M. Hunter와 같은 성경학자는 오병이어 사건을 갈릴리 성만찬”(the Galilean Supper)이라고 본다. 그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갈릴리(오병이어) 그리고 유다(다락방에서의 최후만찬)에서 의미심장한 만찬을 베푸셨다(The Work and Word of Jesus; Westminster, 1950), p. 17. 

[15]영생은 일차적으로 시간적인 개념이 아니다. 영생은 종말에 나타나는 새로운 삶이고, 신적인 생명이다 (김세윤, 요한복음강해; 두란노서원, 2007), p. 54.

[16] Ralph Martin, “The Lord’s Supper” (New Bible Dictionary, ed., D. R. W. Wood, 3rd edition, IVP, 1996), p. 698.

[17] 아마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 나타나는 이 아가페 식사가 남용/오용되는 모습을 보고는, 식사를 위한 시간(공동식사)과 성례전적 행사를 따로 갖길 원했던 것 같고, 1세기 후기에는 교회가 실제로 이런 모습을 취하게 되었다(Martin, 698). 

[18] 초막절 마지막 날에는 성전 제단에 물을 부어 넘치게 하는 의식이 있었다(김세윤, 요한복음강해, p. 118). 예수는 이 의식을 배경으로 자기가 세상에 주어 흘러넘치게 될 물에 관해 말씀하신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7.37-38).

[19] 장 지글러 저, 유영미 역,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갈라파고스, 2000), 뒤 표지 발문

[20] 장 지글러, 바로 위의 책, 39 페이지.

[21] 장 지글러, 바로 위의 책, 37페이지

[22] 장 지글러, 바로 위의 책, 72-73페이지

[23] 장 지글러, 바로 위의 책, 66.

[24] John Stott, Christian Mission in the Modern World (IVP, 1975), p. 26.

[25] John Stott, 바로 위의 책, p. 27.

[26] John Stott, 바로 위의 책, p. 27.

[27] Ron Sider, Rich Christians in an Age of Hunger (Word, 1990), p. 108.

[28] Ron Sider, 바로 위의 책, pp. 153-157

[29] Ron Sider, 바로 위의 책, pp. 170-171

[30] Ron Sider, 바로 위의 책, pp. 185.

[31] Ron Sider, Ibid. p.211.

[32] John Stott, Human Rights and Human Wrongs: Major Issues for a New Century (Baker, 1999), p. 17.

[33] John Stott, 바로 위의 책, 18.

[34] John Swinton, Raging with Compassion (Eerdmans, 2007), p. 244.

[35] John Swinton, 바로 위의 책, 245.

[36] 김세윤, (소책자) 가이사를 얻으라; 바울이 청년들에게 선포하는 한 선교전략 (노잉힘, 2007), p. 3.

[37] 김세윤, 위의 소책자, P. 22.

[38] Steve Rundle and Tom Steffen, “Building a Great Commission Company” (IVP, 2003)을 참조하라.

[39] Stan Guthrie, Missions in the Third Millennium: 21 Key Trends for the 21st Century, Revised and Expanded (paternoster, 2000), p. 138-139

[40] Steve Rundle and Tom Steffen, “Building a Great Commission Company” 인터넷 요약판 (https://www.ywamconnect.com/servlets/DocumentDownloadHandler/104855/29315/73716/Building%20a%20Great%20Commission%20Company_RBR11.pdf), 2009 12 9일 접속.

[41] John Swinton, 바로 위의 책, p. 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