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방법, 성질, 상태 그리고 목적 (엡 2.8-10)
에베소서 2.8-10는 아래와 같은 논리구조로 짜여있습니다.
구원의 방법(은혜/믿음)→ 구원의 성질(선물)→ 구원의 상태(걸작품)→ 구원의 목적(선의 도모)
1. 구원의 방법
구원은 약입니다. 이 약을 먹어야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납니다. 그런데, 아무리 약 먹고 살고 싶어도 사람을 살리는 천하 명약이 있어야죠. 이런 약이 없다면 내가 아무리 빌어본들, 아무리 염원한들, 아무리 간절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성경은 이 약이 존재하고, 또 우리 앞에 주어진 사실을 ‘은혜’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 명약이 내 눈 앞에 있은들 그 약을 먹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명약을 꿀꺽 삼켜 낫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명약을 앞에 놓고도 죽는 길밖엔 없습니다. 성경은 약 먹을 마음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약 먹고 살아보겠다는 간절함보다 약의 존부(存否)가 우선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천하 명약이 있기만 하다면야, 억지로 삼키거나 누워서 마시거나, 심지어 의심하면서 먹거나가 문제 안 됩니다. 그리고 약 개발이 어렵습니까, 먹는 일이 어렵습니까? 약 개발이 어렵지요. 그러니까 믿음도 어떻게 보면 은혜의 일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니, 한걸음 더 나아가면, 은혜나 믿음이나 다 선물입니다.
옥한흠 목사님께서 1998년 안성수양관에서 열린 ‘교회갱신협의회 여름수련회’에서 설교하시면서 예화를 하나 드셨습니다. “저명하고 신실한 기독교인 학자들이 모여 토론하는 자리에서 ‘다른 종교에는 없고 오로지 기독교에만 있는 개념은 무엇인가?’는 주제가 나왔습니다. 자비, 사랑, 믿음, 정의 등등은, 토론을 거치면서 다른 종교에도 다른 이름으로 이미 있는 개념임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C. S. 루이스에게 누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루이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은혜입니다. 도무지 자격이 없는 상대, 아니 자격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원수와도 방불한 상대에게 선물을 준다는 뜻인 은혜는 힌두교, 불교, 유대교, 이슬람교에는 없습니다. 다른 어떤 종교적 신념들에도 은혜 개념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은혜는 오로지 기독교에만 있는 개념입니다.”
2. 구원의 성질
약 먹을 마음보다 약 자체가 중요하기에, 이 약(구원)이 주어진 것을 놓고 내 입장에서는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약 먹을 마음도 (아무리 의심하고 먹는다 해도) 약에 대한 신뢰가 전제되어서 나온 것이기에, 구원 받은 것은 A에서 Z까지 전부 은혜입니다. 선물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이렇게 당연한 사실을 놓고 ‘자랑’ 운운하는 것일까요? 바울이 말하는 자랑할 게 없다는 뜻은 무엇일까요? 구원 받은 사실을 자랑하면 안 되나요? 바울이 자랑할 게 없다는 말은, 구원 받은 게 부끄럽다는 뜻이 아니라, 구원을 만들어내는 일에 내가 털끝만치라도 일조한 게 없다는 말입니다. 선물 받은 것은 고맙고 선물은 자랑할 수 있어도, 마치 내가 그 선물의 획득에 원인이 된 양 한다면 선물한 분에게 모독이겠지요?
3. 구원의 상태
‘만드신 바’는 헬라어로 ‘포이에마’(poiema)입니다. 영어로 ‘포임’하면 ‘시’지요. ‘포이에마’에서 파생한 단어입니다. 아름다운 시, 혹은 걸작품 (영어로 마스터피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걸작품, 하나님의 대표작이라는 것입니다. 착각 말아야 할 것은, 우리 자신에게 아름다운 것이 될 만한 고유한 가치가 애초부터 있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이 만드셔서 (창조하셔서, 신학적으로는 재창조라고 함) 아름다워진 것입니다.
4. 구원의 목적
한국신자들이 많이 헷갈려 하는 대목이 여기입니다. 구원 받은 사실 자체 (약 먹고 죽을 병에서 나은 것)에 너무 감격한 나머지 이제 건강을 회복한 몸이 무엇을 위해 활용되어야 할 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물론 첫째로, 다시 안 아프려고 조심하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즉, 죄라는 치명적인 세균에 다시는 감염되지 않겠다 하고 각오하고 조심하는 일이지요. 그러나 이 생각은 너무 소극적입니다. 회복된, 건강한 몸은 ‘선한 일’을 하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잘 보세요, 선한 일도 어떤 선한 일인가? ‘예수 안에서’입니다. 선한 일 한다면서 내가 나타나고 선한 일 빙자해서 목소리 높이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좋아하실 만한 선한 일을, 예수님이 기뻐하는 방법으로 하는 것이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 새롭게 창조된 나/우리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