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와 물고기
저는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이 늘 미안해서 세금도 많이 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군대는 제게 너무나 익숙한 곳입니다. 아버지는 예비역 중령이셨는데 25년 가까이 군대에서 사셨습니다. 저 역시 장교후보생이었다가 우여곡절을 거쳐 소집면제를 받게 됐습니다.
한국에서 여자들이 듣기 싫어하는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3위가 축구 얘기, 2위, 남자들의 군대 얘기, 그리고 1위가 군대에서 축구 한 얘기라고 합니다. 누가 뭐래도 한국의 남성사회는 아직도 군대를 축으로 이쪽저쪽으로 나누어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군대에 대해 묘한 향수 같은 걸 느낀다는 점은 군대를 제대한 지 오래 돼도 군대를 인연으로 한 모임, 동호회, 심지어 비즈니스가 벌어진다는 사실에서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해병대’의 결속력은 자타가 공인하는 정도입니다. 해병대 아저씨들, 제대한 지 수 십 년이 지나도 얼룩무늬 위장복을 입고 교통정리하길 즐기십니다. ‘한 번 해병 영원 해병....’ 뭐 이런 스티커를 범퍼에 붙인 분들도 많습니다.
어쩌다가 일본을 거쳐 미국에 살게 됐습니다. 제가 사는 곳은 LA에서 5번 고속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20분 정도 달려서 닿는 버뱅크(Burbank)라고 합니다. 작고 조용한 마을입니다. 어느 날 시장에 갔다가 파킹 랏에서 희한한 차를 한 대 보았습니다. 먼저는 크지 않은 이 마을에서 한국 분의 차를 본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범퍼에 붙인 두 장의 스티커로 가 주는 느낌이 하도 묘했습니다. 스티커 한 장은 ‘ROKMC'(Republic of Korea Marine Corpse; 대한민국해병대)였고 다른 한 장은 ’물고기‘였습니다.
아시지요? 물고기가 무엇을 뜻하는지. 물고기를 그리스 말로 익투스(IXTUS)라고 하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Iesus Christus Theu Huios Soterious)의 머리글자가 됩니다. 로마의 박해 속에서 은밀하게 신앙생활을 하던 크리스천들은 신앙의 표시로 물고기를 그려 보였지요. 물고기는 이런 의미를 지닌 상징입니다. 약함, 은밀함, 주목받지 못함, 숨어 지냄....... 이런 물고기가 ‘귀신 잡는 용사 해병’ 옆에 붙어 있는 모습이 제게는 참으로 야릇하게 느껴졌습니다. 세상의 강한 것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약한 것을 동시에 부여잡은 나의 허무맹랑한 신앙이 뢴트겐 당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한테 좋고 내 자식에게 좋은 거라면 하나님이든 귀신 잡는 해병이든 다 잡고 보자는 식의 신앙편의주의....... 범퍼에 붙인 스티커는 애교로 볼 수 있지만, 마음에 도배질한 스티커는 오늘, 지금 둘 중 하나를 떼버려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 안에 아버지의 사랑이 없습니다.
요일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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