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로 읽는 서평

생일

sherwood 2008. 11. 5. 23:17

생일, 장영희, 비채

 

P 목사님께,

사역에 바쁘시죠. 일전 이동전화와 개인용 정보처리기(PDA)가 함께 붙은 육중한 기계를 허리춤에 차고, 바삐 움직이시는 모습을 뵈면서 안쓰러운 생각도 들었습니다. 오늘은 목사님과 제가 지닌 유일한 공통 관심사라고 하신 장영희 선생의 최신간에 대해 이야기 하려고 편지를 띄웁니다.

 

장영희 선생님의 정갈한 문체와 거기 들어있는 깨끗한 영성에 관해서라면 앞에 나온 책들(대표적으로 ‘내 생애 단 한 번’)을 통해 이미 확인된 바라 생각합니다. 소개하는 근간 ‘생일’은 영미의 대표적인 시인들의 시를 영한대역으로 소개하고, 한 페이지나 되려나, 간결하게 저자 자신의 감상을 단 체계로 짜였습니다.

 

원래 한 신문사에 연재하던 글들을 모은 것인데, 연재 중 척추암이 발견되었지만 연재를 쉬지 않았다 합니다. 저자에 대한 큰 실례의 말씀이 되지 않을까 저어되지만, 어려서 앓은 소아마비로 거동도 쉽지 않은 분에게 이런 큰 시련이 닥쳤다는 게, 원망할 누군가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조차 불러일으킵니다. 하지만 정작 저자는 두 겹의 고통을 통해, 두 번 거른 맑고 투명한 신심과 사람, 인생에 대해 더 따사롭고 단정한 시야를 확보하신 것 같아, 무사태평히 지나가는 세월 속에서도 더 각근히 하나님을 찾고, 사람들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지 못하는 제가 더 한심스레 비추어집니다.

 

180여 수나 되는 시들을 이 짧은 지면에 어떻게 소개하겠습니까. 하지만 그 중에서도 제 눈길을 꽉 붙잡는 시 한 수가 있어 그대로 옮겨 적습니다.

 

I'm Nobody

I'm Nobody! Who are You?

Are You-Nobody-too?

Then there's a pair of us!

Don't tell!

They'd banish us-you know!

How dreary-to be-Somebody!

How public-like a frog-

To tell your name-

the livelong June-

To an admiring bog!

 

무명인

난 무명인입니다! 당신은요?

당신도 무명인이신가요?

그럼 우리 둘이 똑같네요!

쉿! 말하지 마세요.

쫓겨날 테니까 말이에요.

얼마나 끔찍할까요, 유명인이 된다는 건!

얼마나 요란할까요, 개구리처럼

긴긴 6월 내내

찬양하는 늪을 향해

개골개골 자기 이름을 외쳐대는 것은.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 미국 여류시인으로서 낯설지 않은 이름이지요. 그런데 이이가 사실은 평생 칩거하면서 독신으로 살았고, 생전에는 시를 쓰고 있는 것조차 몰랐다고 하네요. 세상을 뜨고 나서야 2천 수 정도 남긴 시들이 발견됐다는 군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요. 교회를 다닌다면서도 이름 내고 감투 다투는 우리에 비하면, 이런 시를 쓰고 이렇게 산 사람이 어쩌면 자기부인을 더 잘 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왜, 중세에서도 그랬다지 않습니까. 절반 정도 뚝 떼어놓아도 아쉬울 것 없는 재산을 교회에 헌납한 후 성인(Saint) 칭호를 얻었지만, 평생 조금도 성화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는 그 사이비 성인들 말이죠. 우리도 어쩌면 그런 부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장영희 선생이 이 시에 어떤 감상문을 달았는지 아십니까.

 

“미국 듀크 대학의 농구 감독 시셉스키는 모든 농구 지도자들의 꿈인 LA 레이커스 감독직을 고사했습니다. 제자로부터 ‘한 명의 선수는 단지 손가락 한 개에 불과하지만, 다섯 명으로 뭉치면 단단한 주먹이 된다는 소중한 교훈을 가르쳐주신 감독님, 감독님의 지도와 격려를 받기 위해 이 학교에 왔습니다. 저희들의 감독님으로 남아주십시오.’라는 편지를 받았기 때문이랍니다.”

 

목사님께 설교할 의도는 조금도 없었습니다. 장영희를 읽고 왠지 눈이 밝아진 듯한 기분에 제가 좀 과했다면 과했던 것 같습니다. 교회가 어느 새 허명이 되고 사역이 이름 냄의 또 다른 수단이 되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을 목사님과 함께 하렵니다. 세상부귀 안일함은 포기했는데, 교회영광 중직 자리 쉽게 포기 못하는 ‘개구리’가 되지 않고 싶습니다. 건강 조심하시고, 아빠가 한창 필요할 막내를 위해 짬짬이 아이와도 놀아주십시오. 입시시마 베르바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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