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able of the Dancing God
C. Baxter Kruger, IVP
M 전도사님,
이곳에 다녀가신 후로 무리한 여행이며 사역 일정을 소화하시느라 몸이 많이 상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영성에 관한 권면을 주면서 여러 운동경기 장면을 유비로 사용하는 모습은, 아플 때까지는 몸을 돌보지 않는 교회사역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봅니다. 안 아프고 건강한 게 이웃사랑이요 사역의 기초임을 잊어선 안 될 것 같습니다. 아픈 허리며 만성두통, 어서 나으시길 바랍니다.
초등학교 막 들어가기 전의 일입니다. 예편하신 선친께서 노선 시내버스 사업에 뛰어드셨다가 두 손 들고 나오신 후 가세가 기울어 서울 한 변두리 단칸방에서 살던 때였습니다. 산요라는 일본제 트랜지스터라디오에서 댄스곡이 흘러나오자, 흥이 오른 선친께서 어머니께 춤 한 곡을 청하셨고, 두 분이 서로 안고 그 좁은 단칸방에서 춤을 추기 시작하셨습니다. 춤추시는 아버지를 보고 제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 상상이 가십니까? “여기가 빤 줄 알아?!” 미닫이문을 열고, 저는 그 라디오를 마당으로 던졌습니다. 도라(호랑이를 뜻하는 일본어. 선친은 일본에서 태어나 중학교까지를 그곳에서 졸업하셨습니다)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선친께서는 웬일인지 저를 혼내지 않으셨고, ‘그 놈 참.......’하고 웃고 마시더랍니다. 이 일 있은 몇 해 뒤 선친께서는 세상을 버리셨습니다. 춤추는 아버지의 모습은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이 소책자를 읽으면서 내내 춤추던 선친의 모습이 희미하게 떠올랐습니다. 이 책이 바로 ‘아버지의 춤 솜씨’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누가복음 15장, 탕자 비유의 아버지가 죽었다가 살아났고, 잃었다 찾은 아들 앞에서 춘 춤에 관한 책입니다. 레터지 서 너 장 분량이 될까 말까한 이 책이 제게 준 감동이 제법 오래 가고 있습니다.
저자는 우선 이 비유의 제목이 ‘탕자’여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비유에는 망종 아들 이야기에 비할 수 없는 훨씬 더 깊은 무엇인가가 있다. 그런 이야기라면 아들이 돌아오는 것으로 비유는 끝났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정말 이 비유의 핵심은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아버지에 관한 것이다. 중심인물은 아버지다. 예수가 이 아버지, 그리고 이 아버지가 두 아들과 맺고 있던 관계를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에 관해 소름 돋는 진리를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 이런 비유를 던지셨을까요? “부랑자들과 죄인들, 근본 없는 자들과 실패한 자들이 그에게 몰려들었고, 그런 사람들을 오랜 친구마냥 대”하신 예수께서 “죄인들을 맞아들이는 예수 선생, 당신이 얼마나 거룩한지는 모르겠소만, 어째 이런 자들과 어울릴 수 있단 말이오?”하고 묻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는 가장 일반적인 관념,...... 그 관념이 모조리 틀렸다고 지적함으로써 그들을 소스라치도록 놀라게”하는 게 비유의 목적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 실패를 끌어안는 하나님을 말한다. 아버지의 참 아들, 아버지의 품에 안겨 있으며 아버지의 모든 면모를 아는 예수는 그들의 생각을 산산조각으로 만들어버리는 신학적인 커브볼을 던진다. 그분은 그들의 신학을 거꾸로 떨어뜨린다. 예수는 잘잘못을 기록하고 대조하는 저 높은 곳의 율법수여자가 아니라, 집으로 돌아온 낙오자 앞에서 기쁨을 주체 못해 춤추는 하나님의 모습과 맞닥치도록 그들을 내몬다. 죄인을 찾는 하나님, 그분의 호의를 입을 자격이 조금도 없는 자들을 위해 잔치를 여는 하나님과 마주치게 한다.”
“용서를 위해 밟아야 할 단계”가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용서를 선사하는 아버지, “슬픔과 회개로 아버지 마음에 들게 점수를 딸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애절한 후회와 한숨, 혹 겸손과 종교심이 굶어죽지는 않을 수 있을 정도의 일자리와 음식을 보장”해 줄 거라고 약삭빠르게 계산하는 우리의 알량한 종교심에 내려진 철퇴가 이 비유입니다.
이 소책자를 읽으면서 한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한마디로 그것은 회개하는 것도, 개전의 정을 보이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렇게 말하는 아버지에게 돌아와 그분이 허락하는 여전한 관계에 머무는 것입니다. “아들아, 네가 너를 어떻게 보느냐는 문제가 아니다.......네가 뭘 했고 뭘 실패했는가도 아니다. 내가 네 아비고, 그래서 넌 내 아들이라는 거, 이것만이 문제다. 네가 아비의 참 모습을 알고 그래서 네가 누군지 알면 되는 거다. 넌 나랑 떨어져 있을 수 없다.”
춤추는 아버지의 모습과 더불어 심각하게 다가온 것은 바로 비유의 맏이였습니다.
“맏이에게 아버지 소유가 이미 돌아갔다. 재산은 이미 그의 몫이다. 그런데도 맏이는 재산을 얻으려고 그 오랜 세월 일을 해왔다. 이미 얻은 것을 손에 넣으려고 말이다. 그는 한 번도 그것을 누려본 적이 없다. 아버지 혹은 아버지의 자애로움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던 거다.......아버지, 그리고 동생을 위해 베풀어진 큰 잔치에 대한 맏이의 분노, 아니꼬움은 단순한 격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맏이의 삶 전체가 이런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아버지의 선물을 종교로 바꿔버린,” “실수와 무익함을 자각하기보다는, 그래서 아버지의 온전한 은혜에 자기를 맡기고 넉넉한 안아주심에 안기기는커녕, 종교를 세”우는 사람이 제가 아니었던가, 두렵습니다.
탕자가 효자 되고, 효자가 탕자 되는 역설의 은혜만이 왕 노릇하는 그분의 세계에서 사는 우리요, 자랑하고 싶지만, 알고 보면 우리는 알지 못하는 어떤 신실한 그분 백성이 울며 뿌린 씨앗의 결실을 그저 거두기만 하라고 보냄 받은 은혜의 추수군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혼 때문에 마음 아프고, 사역 때문에 몸이 아픈 전도사님을 생각하면서 혹 위로가 될까 글 한 조각을 덧달고 편지를 마치겠습니다. 베아티 파우페레스 스피리투!
“겸손이란 은혜를 수용하는 자세를 말한다. 아버지의 깜짝 놀랄 만한, 노력으로는 얻어지지 않는 예수 안의 포옹을 받아들이는 태도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자기들을 위해 하신 일에 취하기보다, 하나님을 위해 자기들이 한 일을 더 자랑스레 여기는 자들을 조심하라. 하지만 이런 사람들에게도 잔치에 와 달라 간청하기를 그치지 말라. 이 사람들에게도 이 잔치가 그들의 잔치라고 말하길 그치지 말라. 그리고 지평선을 눈에 힘주어 응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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